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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Feb 02. 2016

사랑을 만났지만, 그 옆에는 이미

-한나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랑

사랑은 무슨 빛깔을 띠는가.


어렵게 만난 사랑, 힘들게 찾은 사랑의 곁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다면...

오늘은 세계적 지성인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한나 아렌트


소설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의 대표작인 <라쇼몽>입니다.


...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갔다. 

그는 여자의 모자와 끊어진 밧줄, 그리고 칼에 찔려 죽은 사무라이를 발견한다. 사건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경찰은 네 명의 증인을 발견했지만 똑같은 사건을 목격한 그들의 진술은 엇갈린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과 기억에 따라 진술이 서로 엇갈리는데,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진술이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쇼몽>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아키라 감독은 이 내용을 영화로 만들어 '베니스영화제 대상'과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 영화상'까지 수상했습니다. 



'라쇼몽 효과'는 인간이라는 불완전성과 '기억의 주관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이 영화를 그래서 좋아했습니다. 그는 30대에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여 20세기 독일의 대표 철학자로 부각되었고, 평생을  '기억의 주관성'이라는 화두에 매달려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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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계에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현존재)은 존재(실존)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룰 것인가. 우연히 이 세계에 온 인간은 불안에 휩싸이지만, 탈존재의 인간은 자기의 존재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본질은 탈존재성이다. 현존재는 시간성에 의해 확정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시간에 의해 확정된다는 것을 밝힌 철학자입니다. 하이데거가 남긴 말들을 볼까요.


"인간의 '피투성( 被投性 내던져져 있음)'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세계 속으로 우리가 이미 던져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투성 상태의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서 세계를 살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불안을 느끼며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어차피 삶의 끝에는 죽음인데, 나는 왜 살고 있을까?’하는 불안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러한 질문을 통해 죽음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던 것처럼 죽음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 "실존은 굴욕적인 것이다."


 "생의 근본적 기분은 불안이다."


 "우리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일상만이 존재한다."


"세계는 고뇌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제공할 것이 없다."



30대 중반의 하이데거는 사상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한나 아렌트는 10대 후반의 아름답고 영민한 제자였습니다. 


35살의 하이데거와 18살의 아렌트가 17년의 나이 차로 만난 것이죠.

아렌트는 20세기 대표적인 정치사상가입니다. 앞에 여류라는 말까지 생략될 정도로 탁월합니다.

그녀는 '도구적 인간'이라는 말을 만든 철학자로,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저자이기도 합니다.

 

아렌트는 훗날 하이데거의 강의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이데거의 (플라톤) 이데아에 대한 강의는 결코 천년 전의 낡고 닳아빠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절실한 문제를  해명하고 있었다."


독일 농부들이 입는 평범하고 서민적인 옷차림을 즐겨 입은, 하이데거의 '실존적 복장'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함과 형식을 넘어선 지성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특히 최고의 지성을 사랑하게 된 18살의 아렌트에게는 인상 깊은 매력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찾은 세상에 괜찮은 것들은 대개 이미 주인이 있듯이,  사랑을 발견했을 때 그의 곁에는 이미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렌트


하이데거는 이미 아들까지 둔 유부남.

아렌트는 5년간 지독한 사랑을 했지만, 그를 온전히 내 남자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시간>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녀와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다는 자료가 많이 드러납니다.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던 그녀는 칼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으러 떠났고, 1929년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히틀러의 등장으로 전환점을 맞습니다.

유태인인 그녀는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중단이 됩니다.


게다가 하이데거는 1933년 11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자격으로 "오직 히틀러 총통만이 독일의 진정한 현실이자 법"이라며 지지연설을 하게 됩니다.


마르쿠제까지 매혹당한 당대 최고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히틀러 지지는 사람들에게 충격과 의문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가 독재자인 히틀러를 지지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전후에도 논란을 일으켜 그가 나치의 협박을 당했다거나 동료 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제적 방어라는 등의 인정론을 받아 하이데거는 복권됩니다. 


하이데거는 나치혁명을 통해 독일이 유럽의 지도자로 부활하기를 희망했고, 그것만이 미국의 물질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에서 유럽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죠. 하지만 그가 기대를 걸었던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과 세계대전이라는 폭력을 향해 질주하게 되죠.


아렌트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공식 논평을 내기도 합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로부터 철학을 배우고 세상을 통찰할 눈이 생겼습니다. 재능있는 그녀를 야스퍼스에게 추천해서 20세기 세계적인 정치사상가로 만든 것도 바로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는 그 특유의 매력적인 강의로 많은 학생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교수입니다. 아렌트 또한 하이데거에 대한 존경에서부터 그녀의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권의 권위는 아주 높았다고 하니 그녀는 하이데거의 통찰력과 빛나는 지성에 대해 어떤 신비함마저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헤어진 후, 하이데거는 필요에 의해 아렌트를 다시 만났고 아렌트는 그저 반가워했습니다. 


아렌트는 유혹하는 여자가 아니라  이해심이 높은 여자였습니다. 

아렌트나 하이데거나 각자 배우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을 듯 그 관계를 이어 갑니다. 


이들의 관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종류의 연인은 아닙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하이데거는 아렌트를 자랑스러운 학생으로 바라보면서 서로 도움을 주었고,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두 사람의  감정은 애착이 침전되면서 깊어진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렌트에게 영향을, 그녀는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녀의  남편인 블뤼허는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한나 아렌트' , 영화로 만들 만큼  그녀도 매력적이다. 


.............................

"아렌트는 자유롭고 기쁘게 사랑했고 관습을 무시했다."


"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난 날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이 사랑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저도 언제나 알고 있었지요.  평소처럼  '당신의 한나'라고 쓰는 대신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맺었다. "신의 뜻에 따라 저는 죽은 이후에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될 거예요."


"자신의 수줍음과 말없는 숭배가 하이데거를 흥분시키고  기쁘게 한다는 것을 그녀는 직관과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


"하이데거는 내가 충실하거나 충실하지 않아도 언제나  (나 아렌트의) 사랑에 빠져있는 남자였다."


"아세요 하이데거, 당신을 만났던 초기에 나는 이틀에  한 번씩 편지를 썼어요. 당신의 반응에 전적으로 확신이 없었고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당신을 거의 노예적으로 따랐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사랑에 대해 한 여자가 갖는 영원한 두려움이에요. 여자는 자신의 사랑이, 넘치는 그 사랑이 상대에게 짐으로 여겨질까 항상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아렌트가 쓴 편지입니다. 조금 덧붙인 건 작가들의 설명이고요.

아렌트의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정치사상에 관한 저서나 글을 본 독자들은 아, 이런 편지도 쓸 수 있는가 경악할 겁니다.   



1950년-

20년 뒤에 다시 만난 하이데거와 아렌트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옛사랑의 끈을 이어갑니다.


이때 충격을 받은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이데거의 부인 엘프레데 죠. 


어느 날 그녀는 하이데거의 지독한 사랑고백을 듣게 됩니다. 

그것도 그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  남편의 제자인 아렌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나는 내 삶의 열정이야."


한나 아렌트- 바로 그녀 때문에 하이데거의 < 존재와 시간>이 나오게 된 겁니다.


하지만 부인 알프레데 역시 하이데거를 떠나지 않고 한결같이 남편의 곁을 지킵니다. 부인 또한 정치철학을 했던 재원이었지만 남편이 연구하거나 글쓰기 편하게 육아와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그녀의 방식대로 사랑을 했습니다.


하이데거가 알프레데의  생일날 보낸  축하 엽서에는 "너 안에서 신에게로, 40년간을 늘 함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뒷면에 부인은 냉소적으로 한마디 씁니다.

"많은 애인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의 모델"-


부인도 하이데거를 선택할 정도면 상당한 인텔리였을 겁니다. 통찰력도 대단하구요, 단지 표현이 적었을 뿐입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두사람은  사제지간을 넘어선 연인이자  학문적 동료로 서로  정신을 교류하며 때로는 동료로, 사제로,  때로는 연인으로 아렌트는 아렌트의 방식대로 사랑을 하고, 부인  알프레데는 가정을 지키고 하이데거를 도와주며 헌신적으로 사랑을 주는  그녀의 방식대로 사랑을 하죠.


하이데거는 연적인 두 여자가 서로 잘 지내기를 바랬다니, 철학자를 떠나 여기에서는 남자의 이기심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대목은 이해가 잘 안 가겠지만, 나이가 들면 여자의 힘이나 발언이 세지는데 독일은 이게 특히 강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이혼을 안 당하려고 애쓰는 것이 독일의 남자 노인들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내부터 이 말을 들으면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짐을 쌀 준비를 합니다.


"나 좋은 남자친구가 생겼어."


좋은 남자가 아니라 좋은 남자친구라고 분식된 말은 더 잔인하죠. 

그러니 구질구질한 모습 보이지 말라는 말이 생략된 겁니다. 그런 독일 여자가 늙은 하이데거를 넉넉하게 감싸 준 겁니다. 어쩌면 그녀 역시  표현하지 못할 강한 질투심과 소유욕 때문에 하이데거를 놓아주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직접 만난 것은 편지가 오간 후 다시  25년이 흐른 뒤입니다.


두 사람이 만난 지 50년 만에 한나는  병상의 하이데거를 찾아갑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제 남편도, 스승인 야스퍼스도 이미 죽은 뒤였고, 자식도 없는 그녀에게 세상의 남은 애착은 오직 하이데거 뿐이었습니다. 

 

하이데거가 생의 막바지에 이른 80대의 여름이었죠. 병상을 늘 지키던 아내는 자리를 비켜줍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이미 지성은 사라지고 거의 식물인간이 된 하이데거는 이제는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녀가 병실에서 나오자, 병든 남편을 둔 부인은 아렌트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시련은 이제  끝났어요, 한나! 상도 많이 타고  여행도 많이 하구... 책도 냈으니.... 이런 당신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나요?"   


그러자 한나는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말합니다.

"...남편이요!"


두 여인은 서로 얻은 것 같았지만, 부족한 걸 서로 하나씩 갖고 있었던 거죠.

한나는 하이데거의 사랑을, 부인은 남편이라는 하이데거의 실존을-

 

그것이 하이데거와 한나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녀는   4개월 뒤인 1975년 12월  심장발작으로 죽습니다. 


하이데거는 5개월 뒤, 아렌트의 뒤를 따라 갑니다. 


결국 죽음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죠. 마치 세상의 미련, 사랑의 후회를 모두 버리고 가는 것처럼 말이죠.


젊음의 정염도 집착도 사라진 그 자리에서 한나는 어떤 마음으로  만났을까요?


아렌트의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남자는 하이데거이지만, 사상적으로 의미가 있는 남자는 아이히만입니다.

아이히만은 6백만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죠.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자동차 기계공으로 숨어 지내다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됩니다.



전체주의의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했던 아렌트는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는 분석기사와 저서를 써서 '폭력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정상적인 남자가 아무 거리낌없이 유태인 학살에 참여하게 된 원인을 분석한 거죠. 악은 평범함 속에서 인간의 내면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죠. 


프랑스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카트린 틀레망은 이 두 사람의 사랑을 소설로 씁니다. <마르틴과 한나>가 바로 그겁니다. 사실과 함께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거죠. 이 소설 속에서 병상에 누운 하이데거를 방문한  1975년,  한나와 하이데거의 부인 알프레데와 대화를 나눕니다. 그 대화를 통해 옛일을 회상하는 것이 이 소설의 큰줄기입니다. 



하이데거가 인생의 마지막 시간인 85세에 다시 만난 두 사람, 50년 만에 재회한 그들의 사랑-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도 그의 부인인 알프레데는 1992년 98살의 나이로 숨졌으니, 아렌트와 하이데거가 세상을  떠난 후 18년이나 홀로 더 살았습니다. 


하이데거가 알프레데와 나눈 편지들을 그녀는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전집을 편찬한 둘째 아들 헤르만 하이데거는   '하이데거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이데거의 친자식이 아니다. 부인 알프레데가 젊은 시절 만난 남자 친구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부인은 하이데거와 아렌트에 대해 멋진 복수를 한 것일까요? 

아렌트는 하이데거와도 남편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얻지 못했으니 말이죠.  


살아남은 자의 고독- 

그녀를 애증으로 괴롭히던 하이데거도 아렌트도 다 떠났습니다.  


알프레데는 그녀 자신과 아렌트의 사이를  오간 하이데거의 사랑을 반추하면서,  질투와 분노, 연민, 애증, 사랑의 추억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잔혹한 세월이었죠. 그래도 영원히  하이데거의 무덤 옆에 있는 아내의 그 자리는 끝내 놓치지 않았습니다. 


세월은 가도 사랑은 남는 것- 사랑의 불꽃이 그들을 위대하게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이 세계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 해도, 만일 그들에게 철학만 있고 사랑이 없었다면 저 또한 이 글은 쓰지 않았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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