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
사랑은 인간에게 오는 혁명 같은 겁니다.
사랑을 하면 평범한 사람도 시인이 된다는 데, 시인이 사랑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도 시인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전국에 가장 시비가 많이 세워진 사람은 유치환입니다. 그만큼 청마의 시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술은 고독과 고통으로 만들어 진다지만, 시인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그 사랑을 더 깊게 하여 시를 만들게 됩니다.
한국문단에서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과 여류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인 이들의 ‘플라토닉 러브’는 유명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의 시, '행복'
이 시는 청마가 이영도 시인에게 보낸 5천통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통영은 한국의 ‘나폴리’라고 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충무공이 삼도수군을 지휘했던 통제영이 있었기에, 도시 이름이 ‘통영’이 되고 한때는 충무가 되기도 했습니다. 통영이든 충무든 이순신 장군의 도시라는 뜻이죠.
한국에서 통영만큼 예술적인 도시가 있을까요? 통영은 소설가 박경리와 음악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이중섭, 시인 김춘수가 나거나 활동을 한 예술의 도시이지만,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이 오가던 도시로도 유명합니다.
통영이 이렇게 넉넉하고 문화의 향기가 흐르는 도시가 된 것은 우리나라 굴의 80% 이상이 통영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도시 전체에 흐르는 경제적 여유가 미술, 음악, 문학 등 예술로 스며든 것입니다.
해방 후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 청마는 그곳에서 수예와 가사를 가르치던 시조시인 이영도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청마는 이미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이영도는 21살에 남편과 사별하여 딸 하나를 둔 청상과부의 미망인이었습니다. 청마는 서른여덟, 이영도는 스물아홉. 이미 가정이 있었으나 청마는 이영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스무 살에 치뤄진 결혼과 철이 들면서,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당시의 보수적인 규범 때문에, 여자인 이영도 시인은 마음의 빗장을 잠그게 됩니다. 이영도는
부담스러워 청마에게 편지를 보내지 말라는 말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보내오는 청마의 연서에 그녀도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답장을 하게 됩니다.
1947년부터 67년까지, 20여년 동안 청마가 교통사고로 숨지기 전까지 두 사람의 ‘플라토닉 사랑’은 주변을 감동시키며 계속 됩니다.
뒤늦게 만나서 찾은 사랑의 발견과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그 애틋함은 두 사람의 마음을 편지로 주고 받으면서 더 깊어지고 정화된 ‘사랑의 시’를 수없이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지금도 청마가 편지를 부치던 통영에 있는 우체통은 ‘청마우체통’으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우체통이 되었고, 청마가 편지를 보내던 통영의 중앙우체국 옆에는 청마의 ‘행복’이란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고통과 고독은 마침내 예술을 낳나 봅니다. 이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은 그 절망과 갈증, 애련의 깊이 만큼 수없는 시를 만들어 내게 합니다.
이영도 시인은 4월의 노래를 쓴 기품과 단아함을 갖춘 시인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청마의 시보다도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를 더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시는 못이룬 사랑과 함께 ‘4월혁명’을 노래한 시이기도 합니다.
진달래
- 다시 4.19 날에
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늘 한복을 입고, 마음을 단정히 했던 이영도를 향한, 청마의 순수한 사랑이 만들어 낸 시입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즉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기旗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청마, ‘그리움’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 ‘깃발’
이영도는 청마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에 대해, 마침내 시로 마음을 보이게 됩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나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영도, ‘무제’
청마의 불길같은 사랑에 대한 이영도의 마음풍경을 나타낸 시입니다. ‘모란’과 ‘황혼에 서서’도 그녀의 마음의 자락을 보게 됩니다.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은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흔든다
-이영도, ‘모란’
산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
- 이영도, ‘황혼에 서서’
이영도는 청마가 자기를 만나러 오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얼마나 절망하고 상심했을까요? 그녀가 청마의 사후, 불과 한 달 만에 청마에게 받는 편지 가운데 2백편을 모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책을 내게 됩니다. 청마를 떠나보낸 후, 그녀의 심경을 엿 볼 수 있는 시입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이영도, ‘탑’
이영도는 청마가 자기 이외에도 죽기 몇년 전부터 다른 여인(반희정 시인)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편지는 '두 사람만이 고이 간직해야 할 세계'라는 생각으로 당초 공개 안하려던 이영도는, 청마의 사고로 여성지에 공개된 청마가 여제자나 반희정에게 보낸 편지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와는 격도 내용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마가 죽은 후, 그녀가 먼저 책이라도 내게 된다면 이영도의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거기에 비록 혼례는 치루지 못하던 사이라 하더라도, 이미 문학적이고 정신적인 청마의 사랑은 오직 이영도 자신뿐이라는 마음이, 그녀를 한달만에 책을 내도록 서두르게 한 겁니다.
이 시집이, 당시로서는 2만 5천부라는 경이적인 판매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청마의 가족은 유치환의 시로 이루어 진 이 책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영도도 이 돈을 쓰지는 않았기에, 이 책의 판매 수익은 훗날 '정운문학상'의 기금이 됩니다. 살아서 맺지 못한 그리움이 이어진 걸까요? 이영도 또한 청마처럼 59세가 되던 해에 집에서 앉아 있다 머리가 아프다며 갑자기 세상을 버리게 됩니다.
엇갈린 인연이라 비록 맺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십년 동안 매일 '사랑의 편지'를 썼다면, 연서를 쓰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행복했을 겁니다.
이루지 못할 애절한 사랑을 예감했던 탓일까요?
청마는 '바위'라는 시를 통해 그들의 사랑을 승화시키게 됩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청마, ‘바위’
보는 사람도 이렇게 가슴아픈데 , 두 사람은 얼마나 애절했을까요.
청마와 정운의 사랑이 다음 생에서는 꼭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없었다면, 세상에 결코 나오지 못했을 시입니다.
넘치도록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 앞길에 있기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