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순훈 Feb 13. 2016

욕망을 버리는 청춘

그대여 어서 일어나 차가운 가슴을 녹여요 또다시 시작되는 아침을 걸어봐요

황소걸음이라는 호를 가진 우보牛步 민태원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이것은 그 유명한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의 첫 문장입니다. 

청춘은 이처럼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합니다. 하지만 요즘 청춘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요즘의 청춘은 경제가 어렵고 취직하기도 힘들어 연애와 결혼, 출산 이 세가지를  포기했다고 하여, ‘3포세대’라고 했습니다. 


'3포세대'는 20대에서 30대에 이르기까지 젊은 층이 좀처럼 연애를 안하려 들고, 연애를 하더라도 결혼을 꺼리며,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포기하는 ‘사회적인 고자되기 현상’을 말하는 겁니다. 어려운 경제가  꿈많은 청춘에게 고자되기를 강요하는 겁니다. 


나 하나도 책임지기 어려운데, 배우자는 물론이고 자녀는 더 책임지기 어렵다는 거죠.      

여기에 취업하기와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는 경우를 ‘5포세대’로 부르더니, 2015년 들어서는 좀처럼 나아질 것이 없으니 ‘인간관계’와 ‘희망’도 포기했다 하여 ‘7포세대’라고도 합니다. 


그러더니 그 포기가 자꾸 늘어납니다. 건강과 외모관리까지 포함해서 ‘9포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꿈도 희망도 없는 삶에 비관하여 삶까지 포기한다고 해서 ‘10포세대’가 되었습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꿈도, 희망도 삶까지 포기했다고 하는데 무엇인들 포기 못할까요?

그래서 몇포세대까지 늘어날진 아무도 몰라서  이 용어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려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하여 'N포세대'라는 단어까지 언론에서 나왔습니다.


제가 여간해서 이런 표현을 잘 안 쓰지만, 저는 이것을 한마디로 쓰레기 기자들, 이른바 ‘기레기’들이 만든 ‘청춘조롱’이자 ‘청춘모멸’, ‘언론갑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N포세대'라는 말에는 청춘의 암울한 현실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이나 배려, 격려, 위로는 전혀 없고, 오히려 청춘의 어려움에 대한 조롱과 모멸만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삼성 비자금으로 구입해  더  유명해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Happy Tears)’ 연작 


더구나 지금의 2,30대는 19년 전인 1997년, 한국이 국가부도 위기가 닥쳐 IMF에 구제금융을 받던 시기에 태어났거나 초등학교들 다녀, 풍요와 성장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했고 어릴 때부터 경제적 충격을 받고 성장한 ‘불행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그냥 ‘경제폭풍의 어려움’에 내던져진 세대인 것이죠. 그들은 태어난 배경이 없으면 이 나라에서는 살기도 성공하기도 어렵다는 ‘흙수저’로 나타나고, 이런 이 나라는 지옥과 같은 나라라는 ‘헬조선’이라는 자조와 원망으로 표현된 겁니다.


일본도 우리처럼 경제불황이 있었지만 젊은이들을 몇포세대니 하며 조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욕심과 야망이 없는 ‘사토리(깨달음)’의 세대라 불렀죠. 요즘 한국과 일본의 청춘은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노력해도 하기 어렵고 이루기 어려우니 포기하거나, 아니면 욕심을 넘어서서 달관하는 것이죠. 그래서 ‘달관세대’라고도 합니다. 


이것도 문화의 차이인가요?


한국은 청춘의 암울함을 드러내놓고 조롱했고, 일본은 청춘의 암울을 감추고 위장했습니다.     


청춘의 한번 비뚤어진 말이나 마음은 자꾸 벼랑을 향해 갑니다.

그러다 보니,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나 ‘허언증’(거짓으로 진실을 패러독스하는  현상)이 유행하고, 저승사자에게 말을 전하는 방식, “~했다고 전하라”는 형태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청춘의 방황이 아니라, 청춘의 절망과 아우성, 청춘의 비명소리죠. 

더 안타까운 것은 청춘이 지르는 비명을 듣고도 해결하려는 노력이 기성세대나 정치권에서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취업을 못하고 길을 잃은 청춘에게 그들을 응원하는 비용을 조금이라도 쥐어주자는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의 관심을 여당은 포퓰리즘으로 매도합니다. 기성세대가 일은 모두 저지르고, 그 일때문에  괴로워하는 청춘의 아우성을 듣고도 아무도 책임을 안 지려는 겁니다. 아니 최소한의 책임의식조차 없는 겁니다.


연세대는 학교 내에 창업을 지원하는 대대적인 기구와 시설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학생들의 취업과 창업을 지원하려고 이렇게 발 벗고 나선 것은 130년이 넘는 연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연세대가 이렇다면 다른 대학은 어떻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희망이 서서히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1%의 특권계층이 부와 권력을 쥐고 흔드는 사회,

99%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회-


청춘의 비명에도 위로보다는 조롱이 오는 사회

청춘에게 '흔들리니까 청춘이다'고 하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잠시 사실을 비껴가는 겁니다.

저는 그들에게 노력하면 된다는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와 국가가 청춘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노력하면 될 수 있게 조금이라도 기댈 언덕이 된 적이 있습니까?


이들은 저주받은 세대도 아니고 재수없는 세대도 아닙니다.

기성세대가 한 정책의 실패, 경제의 실패를 왜 이들의 어깨에 모두 얹어야 합니까? 

이와 함께  기득권을  지키려는 강성노조가 청춘의 취업문을 더 좁힌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역설이지만, 희망은 오히려 이렇게 절망의 벽에 이르러서야 나타납니다. 

모든 것이 극에 달해야 변하는 것이죠.      


정치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청년은 스스로 바라는 것을 요구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요구를 공표할 '청년당'을 만들든, 대학 총학생회는 총선에 나선 여야 후보들에게 청년수당과 청년취업의 법제화를 요구한다면 그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겠죠. 


백의민족의 이 나라에는 지금 백수와 백조가 너무 많습니다.

이게 과연 그들만의 잘못입니까?


청년은 이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촛불을 켤 때입니다.



취업을 위한 스펙이라면 단군 이래 그들이 최고일 겁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취업의 닫힌 문은 그들에게 활짝 열리지 않았습니다.


노력이 부족하다고, 더 노력하라고 그들을 괴롭히지 맙시다.

이제 이 사회는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포옹해 주어야 합니다.


청년이여! 

어느 때까지 신유의 노래, ‘잠자는 공주’처럼 자고만 있을 겁니까?



세상이 미워졌나요

누군가 잊어야만 하나

날마다 쓰러지고 또 다시 일어서지만

달라진 건 없는 가요.


세상길 걷다가 보면

삥 돌아가는 길도 있어

하루를 울었으면 하루는 웃어야 해요.

그래야만이 견딜 수 있어.


앵두빛 그 고운 두 볼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면

그대는 잠에서 깨어나 

나에게 하얀 미소 지을까.


그대여 어서 일어나

차가운 가슴을 녹여요.

또다시 시작되는 아침을 걸어봐요

그대 곁에 나 있을게

                                                    

                             -신유의 노래,  '잠자는 공주'





청년인 그대, 어서 일어나! 

그대여 어서 일어나, 그대여 어서 일어나!


청춘이 간절히 원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몸을 던진다면 설사 얻지 못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청춘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그때에 하지 않는다면, 그 뒤에 남는 것은 루이스의 말처럼 ‘인생의 슬픔’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

할 수 있었는데, 했어야 했는데, 해야만 했는데.“                                      

                                                -루이스 E. 분                  


길을 잃은 청년이여! 

실존 철학자 사르트르는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길을 묻는 청년이여!

인생이든 희망이든, 그 무엇이든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청춘입니다.


내 운명은 바로 나의 것-

청춘의 주인, 운명의 주인이 되십시오. 


당신은 

행복해 질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청춘은 누가 뭐라고 하든 

욕망을 버리는 달관보다는 

야망이 있는 청춘이 더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추신:



오늘 편지에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Happy Tears)’ 그림이 몇점 들어갔습니다. 


행복과 눈물은 반대말이지만 이렇게 역설적으로 공존합니다.

 행복과 눈물이 모두 나 내게 있는 것이죠.


이 그림을 그린 화가도 아들이 그림 책을 보다가,

"아빠는 미키마우스를 절대 못 그릴거야"라는 말을 하자, 이에  자극받아  '행복한 눈물'이  탄생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이 그림이  삼성의 비자금으로 구입한 그림이라는 것이 알려져 유명해진, 정말 '행복한 눈물'입니다.  많은 것을 가진 재벌이 저 그림을 하나 더 갖게되어 흘리는 행복한 눈물이 아니라,  많은 청춘이 이제는 희망을 갖고 흘리는 행복한 눈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핵폭탄을 쏘는 것이 보이는 국가위기라면, 

청년이 무너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국가위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청년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도 청년도 미래도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잠자는 청춘을 깨우는 '왕자의 키스'-

백마를 타고 올 그 왕자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늘은 사람의 길을 끊지 않는다 天无絶人之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