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명인 홍쌍리의 인생 이야기
봄은 꽃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래서 봄날의 기억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꽃과 함께 시작하여, 어느 날 쏟아지는 봄비에 꽃이 떨어지고 무너지면서 봄은 끝이 나게 됩니다.
지금 남녘은 ‘봄꽃축제’가 한창입니다.
우리나라의 꽃 축제는 매년 3월 섬진강 광양마을의 매화축제를 시작으로 제주 유채꽃 축제, 진해 군항제의 벚꽃축제, 양평의 산수유, 강화의 진달래, 태안의 튤립축제, 장미축제 등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은 광양의 '매화축제'를 만든 매실 명인 홍쌍리의 인생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매화는 봄이 아득한 눈 내리는 겨울, 그 찬바람을 뚫고 피어나기에 선비의 지조를 가졌다 하여 ‘매난국죽 (梅蘭菊竹)’이라는 말처럼 사군자의 맨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매화는 꽃을 강조한 이름입니다. 열매를 강조하면 매실나무가 됩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매화는 다른 나무보다 꽃이 일찍 핍니다. 그래서 매실나무를 꽃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화괴(花魁)’라고도 합니다.
매화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일찍 피기에 ‘조매(早梅)’, 추운 겨울 날씨에 핀다고 ‘동매(冬梅)’, 눈 속에 핀다고 ‘설중매(雪中梅)’라고도 합니다. 매화는 꽃의 색에 따라 희면 ‘백매(白梅)’, 붉으면 ‘홍매(紅梅)’라 부릅니다.
우리나라 화가의 경우 대개 18세기까지는 백매를 선호했으나 19세기부터 홍매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당시의 서양문물과 실학의 영향 등 사회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평이한 흰색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홍매를 화가들이 선호하여 신사조처럼 나타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남의 광양에는 ‘매화마을’이 있습니다. 광양제철과 함께 전국적인 명소가 된 곳입니다.
이곳에 ‘매화마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모두 홍쌍리라는 한 여인의 노력 때문입니다.
그녀가 매화를 심고, 매화 열매(매실)로 상품을 만들어 청매실농원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자, 청매실농원 주변에서 마을 사람들은 지천으로 심어진 밤나무나 대나무를 뽑아 그 자리에 하나 둘 모두 매화나무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마을사람이 팔지 못한 매실은 청매실농원에서 모두 사주었기 때문입니다.
홍쌍리는 1943년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차고 영특한 아이였고 집안은 유복했지만 아버지는 딸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많이 배우면 팔자가 사납다”는 생각이 남아있었던 시절의 탓이었습니다.
청매실농원이 있는 광양은 지금은 번듯하지만 이곳이 50년 전에는 전기도 없고 길도 없는 첩첩산골이었습니다.
집은 잘 살았지만 여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홍쌍리 여사는 집에서 소유한 부산 국제시장의 상점에 16살부터 근무를 하게 됩니다.
거기에 밤을 팔러 온 시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결국은 홍여사가 마음에 들어 며느리로 만들게 됩니다.
홍쌍리는 시골, 시골 해도 광양이 이렇게 첩첩산중인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훗날 홍쌍리는 “내가 중학교만 나왔어도 아마 그 산골에서 벌써 도망쳤을 것이다”는 말로 그 실망과 당시의 어려움을 고백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결혼한 후 찾아오자, 제대로 대접도 하지 않고 , “이런 곳에 날 보내 고생시키려고 중학교를 안 보냈냐”고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시집생활이 어렵고 고단했으면 결혼 후 처음 찾아온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다했을까요?
남편이 친척과 함께 남양에 있는 광산개발에 빠져 집안의 돈을 다 밀어 넣고도 실패하자, 홍쌍리에게 남은 것은 엄청난 빚과 사업실패로 얻은 남편의 병이었습니다.
빚쟁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몰려들어 그녀의 머리와 옷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은 배가 고프다며 울어댔습니다. 길도 없고, 보이는 건 실망과 절망뿐이었습니다.
이럴 때 여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빚쟁이들 등쌀에 옷이 찢어지자 그녀는 헌 군복으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군복은 여간해서 찢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 어려움을 견디며 10년 만에 빚을 갚고 그녀는 광양 두메산골의 돌산을 일구어 오늘의 ‘청매실농원’을 이루게 됩니다.
핸드백과 화장품 대신 호미와 삽을 들고 돌산을 헤매 매화천국을 만든 홍쌍리는 지금은 농원의 대표가 되었지만, 아직도 밀짚모자를 쓰고 호미를 들고 일을 찾아다닙니다.
그렇게 30년을 일해서 오늘의 청매실농원을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많은 언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은 농원이 아니라 공원이다. 세상에서 이렇게 공원보다 잘 가꾸어진 농원은 본 적이 없다.”
홍쌍리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매실의 용도를 찾아 다양하게 식품으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전까지의 매실은 술을 담그거나 매실고를 만드는 정도에 머물렀거든요.
벼농사보다도 수입이 좋았던 밤나무, 이곳에 밤나무를 뽑아, 아무도 사지 않는 매실나무를 하나 둘 심자 주변에서는 “며느리를 잘못 들여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것을 다 막아준 사람이 바로 시아버지죠. 그는 그만큼 며느리를 믿었고 농사일을 가르쳐 주며 홍쌍리와 함께 오늘의 청매실농원을 만든 힘이 되어주었던 겁니다.
남편의 광산사업이 망하자, 매화나무에 줄 거름이나 비료를 살 돈이 없어 홍쌍리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과 똥장군을 들고 초등학교 변소의 똥을 푸러 다녔습니다.
하루는 한 아이가 보이지 않자 홍쌍리는 아들을 찾아 헤매는데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막내아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운동장에서 노는데, 자기는 냄새를 풍기며 친구들 앞에서 똥장군을 옮겨야 했기에 창피하기도 하고 일도 하기 싫었겠지요.
“… 엄마,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해? 나도 친구들처럼 놀고 싶고 보리밥은 이제 지겨워… 쌀밥도 먹고 싶어…….”
남편은 병으로 누워있고, 빚쟁이들은 날마다 돈 달라고 난리고, 거름 값을 아끼기 위해 초등학교 변소로 똥을 푸러 온 자신의 한심한 처지와 아들의 말은 비수처럼 홍쌍리의 가슴을 찢었습니다.
“……그래, 그래. 이 엄마가 열심히 일해 꼭 쌀밥을 먹여줄게.”
아들의 고사리 손을 이끌며 어미의 마음이 미어지도록 눈물을 흘려서 만든 곳, 홍쌍리의 호미를 잡은 손이 다 헤질 정도로 고생해서 이룬 곳, 이곳이 매화나무로 산 전체를 덮은 바로 ‘청매실농원’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홍쌍리는 매실을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실험을 직접 다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정보, 책 이런 것이 하나도 없는 첩첩산골에서 혼자서 이 일을 다 한 겁니다.
홍쌍리가 그렇게 만든 제품은 매실된장, 매실고추장, 매실장아찌, 매실정과, 매실원액, 매실씨앗 베개 등 20여 종이 넘습니다.
그렇게 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식품 명인이 되었습니다. 홍쌍리 매실명인이 국무총리상, 대통령상, 산업훈장, 백만불 수출의 탑을 받은 '철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제품을 사러, 또 청매실농원의 매화꽃 절경을 보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자 청매실농원은 매년 3월 매화꽃이 절정일 때, 매화축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개 농원의 축제에서 시작했지만 오늘날 이미 광양시 전체의 축제로 확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화축제에는 한해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게 됩니다. 청매실농원은 입장료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축제 때문에 광양 전체가 먹고 살기에 그녀는 광양에 축복을 준 행운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청매실농원은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가 될 정도로 절경입니다.
그리고 이 농원의 단골손님으로는 법정 스님, 탤런트 고두심, 딸처럼 지내는 배우 최란 씨 등이 있습니다. 뿌리깊은나무 한창기 발행인도 이곳을 즐겨 찾았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주는 이곳을 모두 아꼈던 것이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자 산자락에 음식점 겸 카페를 크게 지으려고 공사를 할 때, 법정스님은 이곳은 암컷의 학이 알을 품은 곳인데 이곳을 공사를 해서 가리면 옆에 있는 수컷 학이 먹이를 물고 오겠는가 조언하자, 그녀는 공사를 중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청매실 농원은 산자락 전체를 매화나무로 덮지만 음식점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법정 스님이 남의 일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말 한마디에 하던 공사를 포기하는 홍여사도 대단한 겁니다.
홍쌍리는 매화로 일가를 이룬 여자입니다. 여자 정주영 같은 존재죠.
그래서일까요?
과거 자신을 천형처럼 괴롭히던 인연에 대해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힘들게 한 인연도 다 좋은 열매를 맺었다.”
매화를 딸로, 매실을 아들처럼 여기며 눈물로 살아온 세월-
홍쌍리 여사는 밤에는 글을 쓰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책으로 냈습니다.
<홍쌍리의 매실 미용 건강이야기>, <매실해독 건강법> <밥상이 약상이라 했제!> <매실아지매 어디서 그리 힘이 나능교?>입니다.
그중에서 제게 가장 기억나는 책은 홍쌍리 자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축약한 <인생은 파도가 쳐야 재밌제이>입니다.
홍쌍리는 하지만 파도치는 인생은 너무 힘드니 조금만 파도를 맞는 인생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홍쌍리는 그녀의 말처럼 ‘느리게 가더라도 내 생각대로 살아왔기에’, 자기 인생에 파도가 쳐도 그 파도를 헤치고 살아온 여인이었기에 이런 책 제목을 쓸 수 있는 것이지요.
내 인생에 파도가 쳐도 거기에 굴복하면 그 다음의 인생은 없습니다.
한 기자가 홍쌍리 여사에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가 한 대답은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이제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세상의 편견, 악조건과 싸우며 살아왔던 그 고단한 70년의 세월-
그래서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살아온 고단한 인생이었지, 평생을 화장 한번 제대로 못해본 여자로서의 존재는 잊고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홍쌍리 여사의 아련한 말은 우리의 가슴을 흔듭니다.
홍매화를 닮은 여자, 홍쌍리-
광양에 매화천국을 만들고 세상에 매화를 선사한 여인.
그녀에게도 여자로서의 봄이 찾아오고, 또 꽃이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추신:
홍쌍리 여사 이야기를 하다보니 ‘매화 이야기’를 사실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 정당매나 백매원 같은 이야기, 고흐가 그린 매화, 김홍도와 매화 등의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제대로 다뤄 보겠습니다.
홍쌍리 여사의 인생을 보면서 하나의 시가 떠오릅니다.
어머니가 구존해 계신다면 전화라도 하시죠.
그리고 조용히 말해주세요.
“… 어머니, 정말 사랑해요.”
세상의 짐을 다 지고 살아온 어머니의 눈물은 당신의 이 말 한마디에 위로가 될 것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