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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Apr 25. 2016

선운사의 동백, 그리고 '절창絕唱'

서정주 '선운사 동구'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최영미 '선운사에서'


혹시 동백꽃이 지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동백꽃이 지는 건 독특합니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거나 시들고 빛깔이 바래서 지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동백은 너무나도 멀쩡한 상태에서 문득 봉오리 전체가 뚝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니 떨어지는 소리까지 귀에 들릴 정도입니다. 그래서 동백꽃이 지는 걸 본다고 하지 않고, 듣는다고도 말합니다.


이 광경을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동백이, 선운사가 사람들에게 더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 때문입니다.    


‘시의 정부’라는 소리를 듣는 미당 서정주-

1942년 고향에서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상경하는 길에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잠시 선운사 동구 주막집을 들르게 됩니다. 거기에서 마흔쯤 되어 보이는 인생도 알고 사랑도 알, 아직도 미색이 남아있는 주모와 술에 취하게 됩니다. 미당의 나이는 서른 정도.


그날따라 손님도 없는 주막-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술잔 속에서 시인과 주모는 요즘 말로 ‘썸 타는 눈빛’도 은근히 주고받았겠지요.

말이 통하는 사내를 만나자, 술기운을 빌어 주모는 구성지게 육자배기를 불렀습니다 .


미당은 술과 육자배기에 취해,

“내 생애에서도 이것이 최고 정상이었네.”

이 말에 주모는 시인에게,  “동백꽃이 피거들랑 또 오시오, 이~”

화답을 합니다.


시인은 슬그머니 화가 났지요.

‘내일  오라고 하지…’.

미당은 술에 취해, 독일어 '이히 리베 디히(난 당신을 사랑해)'를 몇 번 쏟아냈지요.

주모가 그 뜻을 알든 모르든.


우리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에는 무엇보다 쑥스러웠던 게지요.

사랑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하고 그들은 헤어집니다.


시인은 10년 후쯤 이곳을 다시 찾습니다.  주모는 전쟁통에 빨치산에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듣습니다.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인생은 늘 이렇게 뒤늦게 알게 되지요. 목이 멘 절창이 불리게 된 배경이라 하지요.




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여인과 동백과 육자배기가 섞인, 흐드러진 감정의 추억은 이런 절창의 시를 낳게 됩니다.

그 시는 다른 시인 묵객의 시상을 자극해 연이어 두 편의 시를 탄생시켜 선운사와 동백을 잊지 못하게 만들지요.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최영미 여류시인도 한곡 뽑습니다. 두 남자가 뽑았으니 주모 대신 여성의 감정을 시에 담아서 말이죠.




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시인은 아직도 사랑을 못 잊고,  김용택 시인은 그까짓 사랑 때문에 울지는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그러면서 웁니다. 미당의 시는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육자배기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언제 선운사 앞  주막에서 좋은 사람과 만나 막걸리를 마시고 취해 노래를 부를까요?  


자연의 꽃은 필 때나 질 때나 어떤 두려움이나 미련을 보이지 않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힘들게 피었더라도 질 때가 되면 아무 말 없이 '문득' 추락해 버립니다.


사랑과 이별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더라도 그 기억을 잊는 것은 '영영 한참' 걸리는 일입니다. 기억하는 것과 잊어버리는 일,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요?


김경민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잊으려고 할수록 잊히기는커녕 더욱 나를 붙잡는다. 기억은 머리가 시키는 일이고 망각은 가슴이 시키는 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억은 내가 하는 일이고 망각은 시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일까.”


봄날, 우리는 잊어야 할 것이 많은가요, 기억해야 할 것이 많은가요?

인생도 알고,  사랑과 그 상처도 아는 주모의 육자배기나 들으며 막걸리나 한사발 하고 싶은 날입니다.




추신:


‘절창絕唱’을 보통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부르거나, 뛰어난 노래’라고만 기억합니다.

이 뜻 이외에,  절창은 ‘뛰어나게 잘 지은 시’와  ‘아주 뛰어난 명창’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가객 송창식은 노래 '선운사'에 가사를 짓고 작곡도 하고 노래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절창입니다.




 


선운사

                      

                          송창식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떠나실 거에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송창식 노래 '선운사'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B2JwuJpSe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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