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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Apr 20. 2016

고려 5백 년에 남은 여인의 시 한수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린다

당신의 이름이 궁금해요

戀募詩                                                                                                                                                                                                                                                                                                                         


하얀 얼굴의 말 탄 도련님은 누구일까?

馬上誰家白面生

석 달이 다 되도록 이름도 몰랐지?

爾來三月不知名

지금에야 비로소 김태현 임을 알았는데

如今始識金台鉉

가는 눈, 긴 눈썹을 남몰래 사랑한다네

細眼長尾暗入情



이 시는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가 "고려 5백 년에 감상할만한 여인의 시는 단지 이  한 수뿐"이라고 극찬한 사랑시입니다.


김태현은 16세에 감시에 장원하고 훗날 임금이 국정을 맡길 정도로 최고 관직에 오른 사람입니다.


김태현은 학문적 성취가 빨라 선배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했는데,

그의 재능을 아낀 선배는 그를 집에 데려다 몇 번 식사를 함께했는데, 이 집에는 과부가 된 딸이 있어

김태현을 보고 마음을 주었습니다. 짝사랑한 그녀는 어느 날 이 시를 지어 창틈으로 던져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선배의 집에 발길을 끊었지만, 이 시는 남았습니다.

여인의 이름도 잊혔지만, 천년이 지나도 그녀의  마음은 남았습니다.





'내 남자가 되면 좋겠다'


여인의 마음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마음을 뿌리친 사내, 김태현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알면, 이름을 부르면,

사랑도 이렇게 더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지요.


이우성 시인은

'새는 나무가 낳은 꽃'이라는 말을 했지요.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나무-

얼마나 날고 싶으면 새를 낳았을까요?


사람은 나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숙명 속에서

운명을 바꿀 새의 자유를 꿈꾸며 삽니다.


그래서 사랑이 더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날고 싶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일부

     




봄날은 짧습니다.

사랑하기에는 더 짧은 날이죠.


사랑하기에도 짧은 날

싸울 사람은 싸우시고요.




신윤복 '월하정인'




추신:


   

예나 지금이나 미인을 보면,

먼저  수작을 거는 건 사내지요.


다가설 용기가 없어, 여자의 마음을 떠보네요.

그 여자 이름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황진이 입니다.


한 사내가 길을 가다 나귀가 끄는 수레에 앉아 길을 지나가는 미인을 만났습니다.

선녀가 하강한 듯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그만 발길이 얼어붙었지요.

연정의 불길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즉석에서 시를 써서 그녀에게 보냅니다.



마음은 미인을 쫓아가고

心遂紅粧去
몸은 홀로 문에 기댔네
身空獨倚門

마음은 이미 그대에게 빼앗겨 버리고, 나는 빈 몸뚱이만 남아 문에 기대 섰노라는 사내의  애정이 담긴 말입니다. 그녀가 답장을 보내옵니다.


수레가 무거워졌다고 나귀가 성이 났네요.

驢嗔車載重  
한 사람의 마음이 더 실린 까닭이에요.
添却一人魂

그녀의 대답은 동문서답 같습니다.

내 마음을 온통 다 가져가 버렸으니 책임지라는 말에, 그녀는 나귀 걱정만 하고 있으니 말이죠.


사랑하는 마음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나귀도 힘들게 하는 그 마음을 내사 알았다고 여인은 에둘러 멋지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편지의 대문 사진은  드라마 '황진이'의 한 장면입니다. 본문 그림은 혜원의 미인도.


추신의 시는 황진이가 썼다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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