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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May 26. 2016

봄날은 간다

어찌 꽃이 지는 아침만 울고 싶을까,  봄이 가는 아침도 울고 싶어라

봄날은 간다-

               

봄이 그 끝자락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봄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보내기 싫어도 보내야만 합니다. 영원한 봄도, 영원한 겨울도 없는 셈이지요.      


대개는 시(詩)가 사람들에게 영감을 일으켜, 노래도 만들게 하고 그림도 그리게 하고, 영화도 만들게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노래가 영감을 주어 시도 만들고, 연극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영화도 만들게  한 유일한 노래가 있다면 바로 ‘봄날은 간다’ 이 노래일 겁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봄날은 간다’ 가사 1절               



듣거나 부를 때 까닭 없이 눈물이 나는 노래, ‘봄날은 간다’.


노래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 없이도,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까닭 없이 울컥해진다고들 합니다.

누구나 가슴깊이 쟁인 사연이 한, 두 개는  있기에.           


봄날은 간다~

봄날이 좋은 날이라는 걸 알 때는, 머물 때가 아니라 떠나갈 때입니다.

봄날이 떠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그 날이 좋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청춘이나 사랑이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그 존재의 소중함을 새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봄날은 간다’는 마치 인생 같습니다.

‘봄날’이라는 좋은 시절, 그 절정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간다’라는 아스라함, 떠나감, 아쉬움, 후회, 적막, 고독…  어떤 것도 영원함이 없으며,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된다는 '생자필멸'의 슬픈 운명을 지닌 인간의 길, 바로 인생 같은 겁니다.      




절정에서 느끼는 아쉬움과 덧없음-

바로 이것이 ‘봄날은 간다’의 마력입니다.     


사랑에 눈물 흘려본 사람들은 압니다.

텅 빈 가슴 깊숙이 들어와 내 가슴을 뭉텅뭉텅 베어 가는 노래가 있다는 걸 말이죠.      


계간지 '시인세계'가 2004년 시인 100명에게 '좋아하는 노랫말'을 물었습니다.

2~5위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작사 양인자),  '북한강에서'(정태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양희은), '한계령'(하덕규)이 올랐습니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1953년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작사 손로원)였습니다.      

‘봄날은 간다’이 노래를  처음 부른 백설희 이외에도 조용필, 나훈아, 이미자, 김도향, 주현미, 김수희, 최백호, 장사익, 배호, 이선희, 김용임, 신유 등 한국의 정상급 가수 50여 명이 자신의 창법으로 부른 유일한 노래이기도 합니다.     




‘봄날은 간다~’

그 애틋함에 끌려 이렇게 많은 가수가 불렀습니다.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어쩌면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요?     


창처럼 낭랑한 목소리가 구성지게 꺾어지는 백설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뜯는 이미자,

가슴의 슬픔을 밑바닥에서 끌어올려 정한을 눈처럼 뿌려대는 장사익,  

누에가 실을 뽑듯 자연스럽게 노래를 뽑아내는 조용필,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가 날리듯 온 몸을 감싸는 주현미,

거친 목소리로 한 서린 여인의 인생이 느껴지게 하는 한영애,

그 특유의 음색으로 노래의 맛을 느끼게 하는 심수봉,

전자 바이올린으로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조아람….     


노래를 통해 감정을 내지르거나 간수하거나 절제하거나 밀거나…

‘나는 가수다’를 느끼게 합니다.  


여러 가수가 불렀기에,  좋아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저는 최백호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가 좋습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추억의 애수에 잠긴 '낭만에 대하여' 버전처럼 말이죠.

         

 
봄날이 이렇게 갑니다.

우리 인생처럼 어느 날 문득 왔다 속절없이 떠나는 거죠.

봄날의 끝을 알리며 날리는 꽃잎들은 사라져가는 세월이 아니라 마치 인생 같습니다.   


가는 봄은  애잔하고, 그 봄날과 함께 사그라지는 인생은 더 서러운 겁니다.

가는 봄날은, 그래서 더 그립고 애틋합니다.      


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꽃이 피는 5월, 꽃이 지는 5월입니다.

가는 봄은 제 길을 가는 거지만, 우리는 야속하게 간다고 느끼는 겁니다.      


봄이 가면 꽃이 지겠지요.

열매를 맺는 꽃도 있을 것이고, 그냥 지는 꽃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의 기억에 남는 대사죠.


여자의 사랑이 변함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배신받은 사랑의 상처는 새로 오는 사랑도 두렵습니다. 여자는 사랑에 빠질까 두려워 다른 사랑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사랑도 세월도 다 움직이는 겁니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이렇게 봄날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했지만, 어찌 꽃이 지는 아침만 울고 싶을까요,  봄이 가는 아침도 울고싶은 겁니다.

봄이 가는 아침은 눈물이 납니다.

                         





추신:          


‘봄날은 간다’ 가사를 쓴 손로원은 화가였습니다.

원고료보다 술을 더 챙겨 ‘막걸리 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죠.      


손로원은 반야월과 함께 한국 가요의 양대산맥으로  '휘파람 불며' '물레방아 도는 내력' '백마강' '잘 있거라 부산항' ‘비 내리는 호남선’ '홍콩 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경상도 아가씨' '봄날은 간다' 등 3천여 곡을 썼습니다.     


‘봄날은 간다’ 이 노래는 여자에게 버림받아 쓴 노래가 아니라, 집을 홀랑  태우고 쓰게 된 가사입니다.


작사가 손로원에게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집오면서 입었던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고이 간직했는데, 나중에 아들이 장가드는 날 입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그 연분홍 치마를 다시 입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부산 피난시절, 판자촌 화재로 어머니의 사진은 불타 버리고, 연분홍 치마 흰 저고리의 수줍게 웃던 어머니는 손로원의 노래 때문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선운사의 육자배기처럼.



안창홍 화백의 그림,  '봄날은 간다'


대문사진과 본문의 사진은 영화 '봄날은 간다'와 뮤지컬 등 '봄날은 간다'의 포스터

최백호의 '봄날은 간다'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n2sQVrvb_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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