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순훈 May 16. 2016

누가 이 여인의 애절함을 알까?

중국에서 더 알려진 여류시인 이옥봉

                                                                                                                                                                            온몸을 시로 칭칭 감은 여인


명나라 중기, 바닷가에 주검이 떠돌아다녔습니다.

너무나 참혹한 모습에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 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의 시신이었습니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는 빽빽이 시가 적혀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온몸을 자기의 시로 칭칭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이 비참히 죽은 사람은 바로 한국이 낳은 천재 여류시인 이옥봉이었습니다.


실학자 이덕무는 "대개 부녀자란 생각이 얕고 문견이 넓지 못하지만, 이옥봉의 시는 다르다"며  그중에서  '멋과 운치가 있다'라고 평한 시가 바로  '규정閨情'입니다.  


 

                                                                                                             

                               

                 규정閨情 (여인의 마음)                                



                                               이옥봉李玉峰




오시겠다 약속해놓고 어찌 이리 늦으시나요?

有約郞何晩     
뜨락의 매화는 벌써 지려 하는데

庭梅欲謝時
갑자기 가지 위의 까치소리에

忽聞枝上鵲
부질없이 거울만 보며 눈썹을 그립니다.

虛畵鏡中眉




왜 이옥봉은 중국의 바닷가를 떠돌며  죽었을까요?


"이 글을 자네 딸이 지었다는 게  사실인가? 참으로 명문일세 그려?"

재상 신흠은 탄복하며 다시 한번 시문에 눈길을 던집니다. 바로 이 시입니다.


                          

           

     영월을 넘는 길에寧越道中   

                                      

                                                       

                                              이옥봉

 


                                                

닷새는 강을 끼고 사흘은 산을 넘으니

五日長干三日越

노릉의 구름 속에서 슬픈 노래도 끊어졌네
哀辭唱斷魯陵雲
이 몸 또한 왕손의 여자라서

妾身亦是王孫女
이곳의 두견새 울음은 차마 듣기 어려워라    

此地鵑聲不忍聞



"남자도 아닌 여자가 이런 문장을 지은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일세."

재상 신흠은 옥봉의 아버지인 이봉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봉은 양녕대군의 고손자로 선조 때 의병장이자 옥천군수를 지냈고, 이옥봉은 서녀였습니다. 신흠이 읽은 시는 옥봉이 영월을 다녀오면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애끓는 심사를 표현한 겁니다.


"자네 딸은 올해 나이가 몇인가?"

"열여덟이옵니다."

"그럼 이제 혼인을 시켜야겠구만?"

"... 제 여식이 워낙...?"

"워낙?"

"... 남편될 사람은 문장이나 외모가 저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니 웬만해서는...!"


그로부터 4년이 지났지만, 이봉은 딸을 시집보내지 못했습니다. 외모가 있으면 문장이 없고, 문장이 있으면 외모가 없어 옥봉이 번번이 퇴짜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찾은 이가 조원이었습니다. 문장과 외모가 뛰어났지만 그는 이미 결혼한 사내였습니다. 하지만 옥봉은 찾던 사람인데 정실이면 어떻고 소실이면 어떠냐며 매파를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조원(趙瑗)은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20대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사간원의 정언을 지냈습니다. 외모도 헌출한데다 시와 문장이 뛰어났습니다. 조원의 강직한 성품과 문장이 뛰어났던 점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조원은 자신은 이미 혼인한 사람이라고 하여 옥봉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결국 옥봉의 아버지가 조원을 찾아가 자신의 딸을 첩으로 들일 것을 요청하자, 이 또한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봉이 찾아가 설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원의 장인이었습니다.


장인까지 찾아와 조원에게 첩을 들일 것을 권하지만 그는 거부합니다.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은 큰 일을 할 사람이 첩을 거부하는 것은 '장부답지 않은 처사'라며 사위에게 첩을 들일 것을 다시 권유합니다. 당시 영웅은 '1처 3첩'이라는 상식이 일반적이었으니, 지금의 상식과는 다른 시대였지요.  


아버지 이봉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딸이 소실이 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딸에게 걸맞는 배필을 골라주는 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조원은 옥봉의 뛰어난 재주를 알기에 혼인을 위해 가혹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옥봉이 앞으로 절대로 시를 안 짓겠다고 약속하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너무 뛰어난 여자이기에 내키지 않는 혼인이기에, 그리고 조원은 자신이  누구의 남자라는 소리를 주변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옥봉은 '사랑이 텅 빈 마음을 채워준다면 더 이상 시를 짓지 않아도 좋다',  '혼기가 찬 여자로서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부모님에게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 조건을 받아들여 조원의 소실이 됩니다.

  


결혼 후 3년, 옥봉은 조원을 남편이기 보다는 시우처럼 여기고 글을 읽고 문장을 공부하는데만 신경을 씁니다. 옥봉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시간이 지나면 아녀자의 도리를 알겠지 싶었던 남편은 여전히 집안일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치밀게 됩니다.


조원은 아내가 재주 있는 여인이기보다는 집안의 조신한 여인네가 되기를 바랐던 거지요. 그가 울화를 혼자 속으로 삼키며 참을 때  다른 곳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옥봉이 살고 있는 마을에 소도둑이 들어 애매한 농부 한 사람이 도둑으로 몰려 옥에 갇히게 되자, 농부의 아내가  옥봉을 찾아와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부탁하였습니다. 딱한 사정을 들은 옥봉이 그 글을 써줍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爲人訟寃


                                           

                                                 이옥봉


 

세숫대야의 물을 거울로 삼고

洗面盆爲鏡

머리빗은 물로 기름을 삼았네

梳頭水作油

이내 몸이 직녀가 아니거늘

妾身非織女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리오?

郞豈是牽牛    



농부의 아내는 이 글을 관가의 수령에게 바칩니다. 어려운 여건과 견우와 직녀를 비유한 뛰어난 문장에 감동해 농부의 무죄를 믿고 그를 감옥에서 풀어 줍니다. 이 글에 감동하여 관원이 글 쓴 사람을 찾자 결국은 남편까지 알게 됩니다.


그러자 부덕을 쌓기를 바랐던, 조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집안일을 버려두고 책만 읽는 그대를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오. 부인이 집안일을 팽개치고 글만 짓는다면 집안꼴이 어찌 되겠소? 거기에다 이제는 아녀자가 쓴 글이 문지방을 넘어 나라일까지 간섭하니 내 어찌 더 참을 수 있겠소?"     

"그것이 아니오라 너무 사정이 딱하여서..."

"듣기 싫소! 그만 친정으로 돌아가시오. 부부의 연은 오늘로서 끝이오!"

"서방님, 어찌 그런 말씀을... 부부의 연은 하늘이 정한 것을, 사람이 어찌 거역할 수 있겠어요?"


옥봉이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지만, 조원은 뒤도 안 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참을 흐느끼던 옥봉은 자세를 고쳐 조원이 나간 방문을 향해 큰 절을 올립니다.


"서방님, 제가 양가의 규수로 소실로 들어온 건 오로지 서방님의 덕망과 문장을 사모해서였습니다. 이제 서방님께서 저를 버리시니 소녀 이곳을 떠나옵니다. 하여 서방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두고 가오나, 저를 버리신 그 원망은 가슴 깊이 안고 가옵니다."



재능 있는 여인, 옥봉-

남자로 태어났다면 한 시대를 풍미했을 옥봉은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해 이렇게 사랑을 잃고 맙니다. 당시  여자가 시집가서  쫓겨난다는 것은 시댁은 물론 친정에도 갈 곳이 없는 엄청난 절망이지요.


쫓겨나간 옥봉은 이후에도 수없이 잘못을 용서하는 편지와 시를 보낸 듯합니다. 하지만 조원은 냉혹하게도 그 뒤로 다시는 옥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녀가 지은 가슴 절절한 시가 '몽혼(夢魂)'입니다. 꿈속의 넋이 얼마나 많이 오갔으면 길가의 돌이 다 모래가 되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사랑의 시로 본다면 가장 애절한 시일 겁니다.  시 짓는 기쁨조차 포기하며 얻었던 사랑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그 절절한 아픔을 그녀는 이렇게 시로 표현합니다.


                                                                       


                                                                                                     

               별한 別恨 (이별의 한)                  


                                                 이옥봉


이별의 한이 평생의 병이 되어

平生難恨成身病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

酒不能療藥不治   

이불속에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얼음 밑을 흐르는 물 같아

衾裏泣如氷下水  

밤낮을 긴 내를 이루어 흘러도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네

日夜長流不我知                                                                                                  

 


사랑하는 임과의 절연, 그 이별의 고통은 그녀를 '절망과 한'이라는 강가로 이끌었습니다. 그 한이 이처럼 기막힌 절창을 남기게 됩니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임은 그녀를 꿈속에서조차 몸부림치게 하지요.

 

   

TV에 방영된 이옥봉 등 조선의 여류작가





                   몽혼 夢魂 (꿈에서라도 넋이 되어)

 

                                               

                                            이옥봉



요사이 안부를 묻사오니 어떠하신지요?             

近來安否問如何

달 밝은 창가에서 이내 몸 한이 많습니다.        

月白紗窓妾恨多

꿈속 넋으로 하여금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若使夢魂行有跡

문 앞의 돌길 이미 모래가 되었을 것을.            

門前石路已成沙         



보고 싶은 임, 만나고 싶은 임, 그래서 임의 대문 앞을 얼마나 마음속으로 가고 싶었을까요? 그녀가 꿈속에서 조차 찾은 임의 대문 앞, 그 자취를 남긴다면 이미  돌로 만든 길이 그리움으로 부서져 모래가 되었다는 그 애절함은 가슴을 적십니다.


그렇게 애달프면 찾아가야지, 기다리면 그 사람이 올까요?

옥봉과 조원이 다시 만나거나 맺어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강직한 조식 문하의 선비답게 조원은 더 이상 옥봉을 만나지 않았을 겁니다.


세월이 흐르고 옥봉이 잊혀질 무렵-


조선 인조 때 승지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던 중 뜻밖의 질문을 받습니다.


"혹시 조원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 제 부친입니다."


그 대신은 말없이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을 꺼내 넘겨줍니다. 자기가 이 시집을 소장하게 된 경위도 함께 들려주면서 말이죠. 바다에 떠돌던 주검에서 수습한 시, 너무도 뛰어난 시라 이렇게 책으로 엮었다는 것입니다.


조원의 아들은 그동안 소식이 끊긴 아버지 소실인 옥봉의 이야기를 40년 만에 다시 듣게 됩니다. 그것도 외국인 중국에서 말이죠.


이렇게 옥봉의 시는 중국에서 다시 조선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원에게서 내쳐진 옥봉의 시는 그 후 조원의 후손이 다시 엮어서 책으로 냅니다. 조원의 후손인 조경망(1629~1694)이 1704년(숙종 30)에 편집한 <가림세고(嘉林世稿)>는 운강 조원과 그 아들 조희일, 손자 조석형의 글을 묶은 것인데, 여기에 옥봉의 시 32편이 부록으로 엮여 있습니다.


조씨 집안에서 왜 뒤늦게  옥봉을 복권이라도 하듯 조원의 문집에 함께 엮었을까요?


그 문집의 뒷부분에 옥봉의 행장을 기록하였는데, “우리 선조의 행동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옥봉의 재주가 승함을 용납못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하며 조원의 선택을 솔직하게 기록했습니다. 옥봉의 글을 싣는 것 또한 선조의 뜻이며,  옥봉의 글은 후손으로 평할 순 없지만 다만 '문중의 빛'이 된다고 말미에 써놓았습니다. 조원도 옥봉의 처절한 죽음에 대해 후회와 아쉬움이 있었을 겁니다. 자신의 전비에 대한 묵언의 후회가 이렇게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옥봉을 떨칠 수 없다면 그녀의 아픔과 자랑까지 안고가고 싶었던 게지요.


옥봉의 뛰어남을 수용하지 못한 조원의 '옹졸함'을 비판하는 여론이 이미 당대에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옥봉의 시가 중국에서도 이름을 날리니, 이에 대한 해명이자 문집으로 공식발간함으로써 그녀를 조씨 문중으로 받아들인 화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사과를 공식화할 수 없었던 그 시대에서는 이런 표현이 최선이었을 겁니다.


이옥봉의 '몽혼'을 모티브로 한 창작무용극


너무 뛰어났기에 남자들의 질투로 가시밭길을 가야만 했던 이옥봉, 시대가 막았던 그녀의 한과 절망, 그것을 승화시킨 시는 역사 속에서 걸어와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이수광은 옥봉의 시를 말하기를 "옥봉으로부터 시가 아름다워졌다"는 극찬을 합니다.


그녀는 유교로 폐쇄된 조선을 넘어 자유롭게 시를 쓰기 위하여  중국으로 가려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전쟁통에 배가 침몰하자 시라도 남기기 위해, 온몸을 자신의 시로 칭칭 감고 바다로 뛰어든 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사랑을 잃고 온 몸을 자기의 시로 동여맨 채, 인연이 있으면 만나리라 하고 무작정 바다로 몸을 던진 건지도 모릅니다.


이옥봉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여류시인이 되었습니다.       


재능이 넘쳤기에 남자들의 질투와 시기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사연-

절창의 능력을 가졌지만 이를 수용 못하는 시대는 옥봉의 억울한 죽음을 낳았습니다. 그 사랑의 고통이 이토록 절절한 시를 남겼는 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너무 뛰어난 여인은 배필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더 뛰어난 남자가 배필이 아니라, 그녀의 재능까지 포용할,  '마음 큰' 남자가 배필인 것입니다.

 

옥봉은 말이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시 하나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대신할 뿐입니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그녀의 삶은 결국 시로 남았습니다.

시인답게 시를 칭칭 동여매고 죽은 여인-

그녀의 애절함은 어디에 닿아야 풀릴는지요.


                   



        

                이별 離別 


                                       

                                  이옥봉




이 밤, 우리 이별 너무 아쉬워

人間此夜 離情多

달은 멀리 저 물결 속으로 지고

落月蒼茫 人遠波

묻고 싶어요, 이 밤 어디서 주무시는지?

借問今宵 何處宿

구름 속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소리에 잠 못 이루시리.

旅窓空聽 雲鴻過

매거진의 이전글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