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순훈 Sep 02. 2016

밥벌이, 그 지겹고 고단한 것에 대하여

세상을 산다는 것, 이건 아주 단순하게 말해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갖는 이 동물적 요소, 밥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을 유지하려면 밥을 벌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비애다. 새도 나무도 스스로 먹을 수 있는데 인간은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밥벌이'라는 걸 하는 것이다.

  

이 '밥벌이'라는 게 신성한 노동이라는 사실을 떠나,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사람을 피곤하고 지겹고 고단하게 하는 이다.


김홍도 그림 '점심'



김훈은 수필집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핸드폰은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 핸드폰이 죽는 소리는 가볍고 하찮다. 핸드폰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핸드폰이 죽을 때 내는 이 꼬르륵 소리는 대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보다도 더 절박하게 삶의 하찮음을 일깨운다.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 버리면 나는 이 세계와 단절된다. 거리에서,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 버리면, 나는 문득 이제 그만 살고 싶어진다. 내가 이 세상과 단절되는 소리가 이처럼 사소하다니. 꼬르륵…….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 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예수님이 인간의 밥벌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시느니라’라고 하셨다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한다. 하느님이 새는 맨입으로 먹여주실지 몰라도 인간을 맨입에 먹여주시지는 않는다.”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사람은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한 개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한 작가가 글을 쓰는데 아들이 놀자고 방해를 한다.아들이  좋아하는 과자도 장난감도 아빠가 글을 써야 나온다고 사정해도 소용없다. 과자와 장난감은 마트에서 사고 그건 카드가 사는 줄 아이는 안다. 돈을 벌기 위해 사정하는 아빠를 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하더니 돼지저금통을 가져와 아빠에게 던진다.


“이거 줄게! 됐지, 이제 나하고 놀자!”     


아들의 말에 아빠는 돌연 울고 싶다.


‘지금 내가 무슨 지랄인가. 자유롭기 위해, 글을 쓴다고, 신문사고 뭐고 다 때려치웠는데 아들하고 놀 시간도 없는 불쌍한 인생 같아서…’     


우리는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그래야 사니까.

그것이 더 슬퍼서 꾸역꾸역 먹는 것이다. 꾸역꾸역...

밥벌이도 지겹고 그것에 목줄이 매인 자신은 더 지겨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밥벌이가 되는 것은 다 판다.

물건도 몸도 생각도...     


밥벌이에 도움이 되려고 돈을 갖다 주면 그건 뇌물이 된다. 똑같은 뇌물이라도 이걸 보는 여당과 야당의 눈이 다르다.


여당이 받은 뇌물은 치부형이고, 야당이 받은 뇌물은 생계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야당은 뇌물 받고 감옥 가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교도소 앞에까지 간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알기에 밥벌이하다 걸린 그 비애를 동지처럼 여기는 것이다.


여당은 뇌물 그런 이야기가 나온 순간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떠난다. 밥벌이를 망치고, 깨진 밥그릇을 들고 있는 그와 함께  묻혀갈까 두려워서.  밥벌이에 걱정없는 인간들이 더 잔인한 것이다.

 아니 이들은 밥벌이를 걱정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남의 밥벌이에 무관심한지도 모른다. 오직 관심있는 건 자기만의 밥, 자기만의 밥벌이인지도 모른다.


     


조선소가 무너지더니 한진해운이 무너졌다.

갑자기 밥벌이가 사라진 사람, 사라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국회에서는 한마디 한다.

“먹고 사는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겠다.”     


-그걸 이제야 중요하게 생각했다니... 정말 국회의원답다!


청와대는 갑자기 조선일보와 싸움을 한다.

한 만평은,  둘이 여자를 옆에 끼고 술 먹다 다툼이 생겨 옆사람을  술병으로 머리를 내리치자, 피를 흘린다. 한 사람이  일어나며 한마디 한다.

“(놀아주니까) 내가  친구인 줄 알아?”     


-‘부패한 기득권’이라고 말하던데, 그럼 다른  한쪽은 뭘까?


싸움 참견도 재미가 있나 보다. 신문도 방송도 언론노조까지 죄다 붙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도대체 우수석이 뭐길래. 그 뒤에 뭐가 있길래 조선의 주필까지 날라갈까. 싸움의 원인은 다 잊었다.  왕실장도 십상시도 저러지는 않았는데...

 

저 사람들은 밥벌이와 애당초 무관한 사람들인가?

밥벌이를 무시할 만큼 쌓아놓은 게 많아서인가 아니면 더 큰 밥벌이를 위해 저러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낚시바늘든 밥을 먹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걸까?     


“결국 어느 바닥이나 똑같구나. 밥벌이는 다 지겨워.”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작가 김훈의 말마따나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분노도 노력도 치욕도 참아냄도 다 밥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인생 자체가 비애다.


그래서 가장이니 아버지이니 하는 말에는 책임과 비애의 강이 흐른다.

    

스탕달은 말했다.

아, 우리의 빛나는 날들이 밥벌이 때문에 얼마나 소진되고 낭비되었는지 너무끔찍하다고.


비애와 끔찍, 책임과  현실


이걸 잊지 말고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가  없다.      

핸드폰을 차고 오늘도 꾸역꾸역 밥을 먹으면서.  











                   

밥은 하늘입니다




                            김지하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존재의 순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