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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Oct 20. 2016

존재의 순간들

사진을 통해 보는 시간과 이미지

    

시대는 이제 문자에서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영상이 바로 이미지다.


이미지(心像, 影像)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지의 시대'다.

정치인의 이미지, 기업의 이미지, 명품의 이미지, 스타의 이미지... 이렇게 이미지는 새로운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미지는 권력이다.

어떤 분야든 성공과 권력의 원천이 바로 이미지에서 나온다.      


성공한 이미지는 정치, 방송, 종교, 연예, 스포츠 등 모든 부문을 막론하고 성공으로 가는 결정적 열쇠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간파한다.

 "우리의 현실은 늘 이미지에 기록된 대로 해석되어 왔다. "

플라톤 이래 많은 철학자들이 이미지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현실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다양하게 제시하며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이미지의 그 언덕 너머에 있는 진실에 도달하고자 했음에도 말이다. 

    

이미지는 살아서 움직인다. 그래서 그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확산된다. 러시아 슈크로브스키(Chklovsky)는 “모든 예술은 이미지로 이루어 진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는 이미지가 예술을 넘어 이미 정치권력과 실생활까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스타가 사용하고 광고하는 상품은 단번에 명품의 반열에 오르고, 일류회사가 만든 제품은 해당분야에 처음 진입했어도  명품의 대접을 받는다. 정치인의 말은 그 말을 쓴 작가의 이미지를 넘어선다.       


현대는 정보가 넘치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포이에르바하의 말처럼

"사물보다는 형상을, 원본보다는 복제를, 현실보다는 표상을, 본질보다는 가상을 선호한다."


그의 예견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글보다는 한 장의 사진, 이미지에 더 끌린다. 영상의 시대인 현대에서 무한한 권위를 지니게 된 이미지는 주로 사진의 이미지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미지에 지배당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복잡함과  넘치는 정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대중사회의 합작품이다.     


하지만 이미지와 인간의 기억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영화 <메멘토>에서 감독이 표현하려고 했듯이, 정보와 기억은 유한하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진(이미지)은 회화와 글에서 더 이상 그 영향력에서 다투려고 하지 않는다. 사진은 글과 그림만이 아니라 이미 모든 분야에서 그 힘을 나타내며 세상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이 있는 사진, 주관이 있는 사진, 앵글이 있는 사진은 더 중요하다.     


한 장의 사진은 때로는 어떤 글보다도 많은 것을 표현한다.

<라이프>지에 실렸던 베트남에서 포화에 쫓겨 울면서 뛰고 있는 벌거벗은 소녀의 사진은 전쟁의 상처와 비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     


베트남전쟁


전쟁의 끝을 환호하는 미국 해병과 전함에서 내린 해병을 맞이하는 한 아가씨의 키스 사진도 그렇다.      


하지만 이 시대는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서사적인 사진보다는 더 자극적이고, 더 빠른 이미지의 사진들을 요구한다. 그래서 세상은 또 다른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새로운 사진들로 대체되고 있다.      


이미지의 급속한 변화는 세계정상에 섰던 필름회사도 디지털카메라가 나오자 기업이 퇴출 위기에 놓인다. 카메라는 갈수록 기능이 진화하는 핸드폰에 그 지위를 계속 위협받고 있다.      


사진기와 필름의 위기와는 무관하게 사진기술은 발달하고 있다. 그건 사진이 갖는 대중적인 힘과 영향력은 갈수록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영향력만큼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     


이것은 사진이 주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주는 본질적 물음이 될 것이다. 사진을 어느 방향에서 무엇을 강조해서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이미지는 충분히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은 사진이 주는 힘과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사진은 피사체와 닮았을 뿐 아니라 피사체에 대한 일종의 봉헌물이다. 심지어 피사체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잠재적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피사체를 소유하고 지배하지만, 거꾸로 사진에게 지배당할 수도 있다.”     


화가가 손으로 그리는 비싼 초상화를 대체할 수단으로 만들어진 사진은, 이미 가족 앨범을 넘어서서 기상예보, 미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경찰업무, 의학, 군사목적용 정찰, 예술사 연구 등 그 범위를 넓히며 영향력을 넓히는 동안 대중들은 실제 사물보다 사진이 나타내는 이미지를 더 따르게 되고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사진도 글처럼 영원히 남는 존재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니엡스는 글쓰기와 비교해 사진을 ‘태양으로 쓴 글’이라 불렀고, 탈보트는 카메라를 ‘자연의 연필’이라고 불렀다.     


사실 사진은 대중적이다.

회화는 재능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지만, 사진은 카메라의 기능을 이해하고 찍으려는 목적과 감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순간을 포착하여 좋은 사진을 만들 수 있다. 재능은 사진을 찍는 기본요소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역설적으로 사진을 통해 어떤 것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고 어떤 목적에도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손택은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장면도  안전함을 선전하는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의 이미지가 목적에 따라 왜곡될 가능성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분칠하는 ‘포토샵’은 이미지를 변형하는 수단이다. 이처럼 목적에 따라 이미지는 본질조차 바꾸고 왜곡시킬 수 있다.       


히틀러


사진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사진만 보고 사랑에 빠지게도 되고, 어떤 사진은 사건해결의  단서가 되고, 어떤 사진은 범죄충동을, 어떤 사진은 악마의 징표나 부적처럼 활용되는 다양한 형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사진을 우호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사진은 천박하고, 지나치게 시각중심적이고, 그저 의도적으로 과거와 관계를 맺는 동의어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진이 주는 가장 큰 장점과 허상, 그 영향력은 수전 손택의 이 한마디로 표현된다.     

"우리는 현실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이미지는 소유할 수 있다.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을 소유한다."     


현대인은 과거가 아니라 현실을 소유할 수 있다. 다만 그건 실제가 아니라 이미지일 뿐이다.      


수전 손택은 알고 있다. 그래서 사진의 약점에 대해서 슬픈 고백을 한다.     

"사진은 거짓된 소유이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거짓으로 소유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진인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사진이 주는 그  이미지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고, 또 스스로를 그 미망에 가두려고도 한다. 이것이 사진이 주는 힘이자 족쇄이고 고민이다.     




사진은 우리에게 성찰을 줄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이미지에 기반한 문화에서 성장한다. 그래서 구매촉진과 계급, 인종, 성의 갈등이 빚는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해 더 많은 오락거리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늘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모든 매체에서 사진은 넘쳐난다.


대중에게는 구경거리를, 통치자에게는 감시대상 포착과 함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사진(이미지)이다.      


다양한 이미지와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자유가, 마치 자유 자체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현대의 사진은 자유로운 영혼, 생각하는 인간을 강조하는 플라톤의 철학을 소멸시키고 있다.      


플라톤은 "이미지란 무상하며, 별로 유익하지 않다. 비물질적이고 현실의 사물과 함께 존재하는 미망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파했지만, 현대에서 사진이 주는 이미지의 위력은 영상을 현실이나 정보로 만들어 소비를 창출하고, 새로운 권력을 만드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진, 이미지를 넘어설 대항수단이 이제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수전 손택은 이미지가 지배하는 이런 현실에 대해, 사진과 이미지의 본질적 고민을 말했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벗겨진 미인 등 관음증적인 향락을 즐기지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타인의 고통에는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사진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성찰할 수 있을까?




한때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러나, 그 성찰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부터, 전쟁(혹은 전투)이 발생할 때마다 참상이 필름에 담기거나, 베트남전부터 텔레비전을 통해 이것이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면서, 그것은 이미지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는 사진에 대해 본질적인 고민을 하게 한다. 여객기의 충돌로 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상황'이라는 인식은, 그 참상을 "마치 영화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지가 주는 충격이, 한편의 영상처럼 소화되는 단계. 어쩌면 사람들은 이제 이미지를 통해 성찰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희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욕망만 남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미지로부터 무엇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미지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행위.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함께 사는 행위이자 인간적인 존재를 스스로 찾는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진을 통해 보는 탈북자가 겪는 고통이나 북한 수용소에서의 참상을 보아도 현재 우리가 누리는 안일함과 평화라는 특권은 그들을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만일 한반도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세계의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전에 해가 없다면 우리가 겪게 될 고통과 파괴조차 영화처럼 즐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어떤 이에게는 흘러가는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쌓여가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대로 ‘존재의 순간들’을 남기는 게 사진이라면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미지의 노예로 살지 않으며 주인처럼 살 수 있을까.     


사진은 이제 사진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스마트폰의 발달로 대중이 사진을 스스로 찍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프지도 사진작가도 사라지고 있다. 언론사의 사진부도 몰락하고 있다. 세상에는 작가는 적고 사진기술자만 넘친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사진과 사진작가를 더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라이프지나 최민식, 배병휴 같은.   

그렇기에 <노동의 새벽>을 쓴 박노해 같은 시인은 이제 사진을 찍으며, 인간의 본질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실 속에 묻혀있을 그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는 사실을 헤치며, 그 언덕 너머에 있는 진실을 찾아 힘든 행군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화장하지 않고, 성형하지 않은 맨얼굴의 진실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이미지에 대한 두 가지 명제는 남는다. 우리가 계속 고민할 숙제들이다.          


"우리는 현실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이미지를 통해서는 현실을 소유할 수 있다"                 


"사진은 이미지로 세상을 지배하고,

현실은 이미지에 기록된 대로 해석되어 왔다"   


             



추신:


대문과 본문의 사진은

사진을 통해 말을 하고,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본 <라이프>지의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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