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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Jul 25. 2016

낭만식객, 홍성유가  선정한 1%의 '맛집'

여행길,  낯선 곳에 선  당신을 위하여


낯선 곳, 여행길에 들르는 음식점.

이곳에서 즐기는 별미는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천하절경도 맛있는 음식의 다음이다.  


방송이나 신문, 지자체에서 소개한 각종 상업적 '맛집'에 실망한 당신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소설가 백파 홍성유는 특이한 인물이다.

서울법대를 나와 남이 지은 글(법전)을 읽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글을 쓰는 걸 즐겼기 때문이다.


백파 홍성유 선생


지금도 서울법대 출신이 적지만, 그가 학교를 졸업한 당시는 서울법대는 고사하고 대학생 자체가 귀할 때였다.       


백파는 호방하면서도 활달한 남성적 문체와 시대 의식이 짙게 묻어나는 역사소설을 많이 쓴 작가이자, 학창 시절 일본 학생을 때려 감옥에 들어간 그는 감옥에서 배운 기술로 도박의 달인으로 통하기도 하였다.      


도박을 좋아한 백파는 우리나라에 고스톱의 복잡 미묘한 규칙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하지만 딸의 순한 눈빛 때문에 도박판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또한, 야구를 좋아해 한때 서울 잠실구장에는 그의 지정석까지 마련돼 있었다고 한다.  


자기가 원한다면 법조계가 아니라 어떤 분야의 일도 다 할 수 있는 그가 왜 돈도, 명예도 얻기 힘든 가난한(?) 작가의 길을 택했느냐 그 재능을 아까워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남긴 소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영화로도 나온  ‘장군의 아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미식가였던 그가 쓴 맛 기행이다. 그는 소설을 쓰는 일 못지않게 별미를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그가 맛본 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도 그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검사와 변호사 친구들이 많았던 그는 전국을 다니면서 친구들이 사주는 좋은 음식점을 다니면서 음식의 맛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소설 나부랭이나 쓴다고 고생하는 친구를 위해 밥이나 술 정도는 얼마든지 살 위치에 있었으니까.        


작가 홍성유가 음식 칼럼을 쓰게 된 계기는 소설가 故 김동리 선생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식가였던 홍성유가 김동리 선생과 각별한 친분으로 간 음식점이 요즘 말로 가격도 착하고 맛도 착한 곳들이었다.       


그의 백발이었던 머리를 비유해 ‘백파(伯坡)’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었던 김동리 선생은 홍성유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음식 맛을 우리 문인들도 알자”고 권유했다.      


그래서 문예지 <월간 문학>에 ‘별미기행’을 연재하게 된 것이 첫 시작이다.      

홍성유 선생은 맛집 소개를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다 깜짝 놀랐다. 조용하던 음식점 앞에 난데없이 자동차가 몰려들어 교통순경이 나와 정리를 할 정도로 혼잡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쓴 글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왜 그런가 구경하러 갔다가 그 이유를 알고 박장대소를 하고는 가려던 식당을 포기한 일화도 있다.      


그 후 ‘주간조선’ '조선일보' 등 국내 주간지와 일간지에 계속해서 연재를 하면서 무려 30년간 별미기행을 이어왔다. 이런 맛집들이 쌓이고 쌓여 <한국 맛있는 집 1234점>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당신이 여행을 간다면, 또 가는 곳이 처음 가는 곳이라면 인터넷으로 그 지역에 있는 ‘백파 홍성유 맛집’을 검색하여 간다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을 소개하면, 가족과 지방에 갔다 오는 길에 예산의 수덕사 근처를 지날 때였다.


그곳에는 백파가 소개한 한정식집, ‘그때 그집’이 있다. 그곳을 예전에 다녀왔기에 들르게 된 것이다. 당시 딸아이는 다이어트 중이라, 자기는 어떤 곳을 가든 밥을 거의 안 먹겠다고 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손님이 세 팀이 있었는데, 휴가철이라 그런지 모두 가족과 왔었다. 그중 아는 얼굴이 2명인데  전, 현직 국회의원이었다.     

   

거식증에 걸릴 정도로 밥을 혐오하던 딸아이가 이곳에서 밥 그릇을 비웠다. 오래된 장맛에 반했다. 이 정도로 홍성유 선생의 맛집은 맛이 있고, 그 맛도 깊다.      


딸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집 음식은 마약을 넣었나 봐. 도저히 유혹을 참을 수 없어.  집에서 멀리 있어 다행이야."


이에 비해  방송이나 신문, 지자체에서 소개하는 맛집은 격도 떨어지고, 그 맛도 실망하게 된다. 맛집을 선정할 때 안목이 적었거나, 음식보다는 다른 요소가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홍성유 선생 이외의 맛집은 사실 거의 믿지 않는다.        


홍성유 선생은 ‘별미기행’ 취재를 즐겨, 혼자서 다니다가 나중에는 친구나 문인들을 대동해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음식점을 찾기도 했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음식점 사장을 불러 설명을 듣는다. 주 메뉴에서부터 음식의 특징과 규모, 역사 등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고 메모한다. 초창기에는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식당 비밀 정보를 캐는 이로 오인해 멱살잡이를 당하는 수모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행사나 모임에서 건배 제의를 할 때면 항상 외치는 말이 있다. “즐겁게!”라고 참석자들이 선창을 하면 백파 선생은 “맛있게!”라며 후창을 한다.      


선생이 소개한 음식점이 유명해지다 보니, 이름만 알려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알음알음  아는 사람 소개로 음식점 주인들이 자천으로 소개해 달라는 일도 많았다. 그때 선생은 어떻게 했을까.      


일단 소개해 준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 음식점을 가본다. 하지만 예고 없이 가서 맛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맛없는 곳이면 절대로 소개를 하지 않는다.      


음식점 주인 중에는 때로는 자기가 만든 음식에 대해 자존심이 아주 센 사람도 있다. 백파가 “음식이 맛이 없어서 소개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일주일을 고민하다 고깃집을 때려치우고 업종을 변경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재심사를 통과해 성공한 음식점도 있다.  송파에 있는 ‘백제 해물 낙지’가 바로 그곳이다.      


백파의 소개로 이름이 알려져  돈을 많이 번 음식점 사장도 꽤 될 것이다. 백파가 소개한 음식점 사장 100명이 모여 1993년, '음식은 맛있게 음미하며, 오래 씹을 때야 비로소  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의 '다담회 (多啖會)'를 만들었다.


회장은 그들의 추대로 백파 홍성유 선생이 되었다. 선생의 칠순 때는 그가 소개한 전국의 대표 음식들 80가지가 음식상에 올랐다. 그것도 주인들이 직접 최고의 솜씨를 발휘해서.


재벌도 받기 힘든 고희상이었다. 음식장인 80명이 동원된 상은  돈이야 어떻게 한다 해도, 그 정성까지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담회는 1천 명 이상의 미식가와 음식점 사장들의 모임이 되었다.  선생이 선정한 맛집답게,  ‘맛을 알고, 멋을 아는’ 모임으로, 그리고 맛을 연구하고 조리법을 공유하여 맛을 찾는 장인 모임으로 발전했다.

다담회는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추모비를 세우기도 했다. 선생이 떠난 이후 10년이 넘어서야 다담회 이름으로 맛집을 일부 선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음식을 통한 인연은 계속 아름다움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음식 소개를 처음 한 사람은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교산 허균이다. 1611년, 허균이 전라도 바닷가로 귀양 가서 그곳의 거칠고 험한 음식을 먹다가 예전에 먹던 음식 맛을 그리워하면서 지었다는 책이 '도문대작(屠門大嚼)'이다. 이 책은 조선 팔도의 토산물과 별미음식을 소개했다.


도문(屠門)은 소나 돼지를 잡는 푸줏간의 문이고, 대작(大嚼)은 크게 씹는다는 뜻이니 '(만들 음식이 맛이 있어 그 생각에) 푸줏간 문을 향해 입맛을 다신다' 쯤으로 풀 수 있겠다. 허균은 형조판서 출신이고 아버지는 동인의 영수였다, 이복 형은 이조판서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으니, 팔도음식의 그 진미를 고루고루 맛볼 수 있었다. 허균 또한 미식가였기에,  맛을 평하는 글을 쓸 수 있었다.      


백파도 이런 낭만파 식객의 정서를 가졌고, 미식가였기에 이런 글을 썼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백파 홍성유 선생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소신껏 활동했기 때문에 그가 소개한 음식점들에 신뢰가 간다. 그래서 백파가 소개한 음식점은 식당을 운영하는 이들에게도 자부심과 긍지를 주고 있다.      


백파가 세상을 떠났기에, 이제 더 이상 그가 추천하는 새로운 별미 음식점을 만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음식에 대한 사랑은 후대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판,검사로  산 것보다는 덜 화려했겠지만, 이런 글을 썼기에 백파는 판,검사보다 더 존경받고, 더  오래남는 인물이 되었다.


필자도 백파가 소개한 음식점들을 30%도 다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본 곳들 중에서 실망한 곳은 한 번도 없었다.


여행길에서 맛집에 실망한 사람이라면,  

우리 시대 낭만파 식객인 백파가 소개한 음식을 맛보면서,  세상사는 힘도 얻고 재미도 얻으시길 바란다.        


맹자가 말하는  '인생삼락(人生三樂)'은 더 높은 차원에 있지만,  서민의 인생삼락은 맛있는 음식에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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