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
장무상망(長毋相忘)
장무상망(長毋相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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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
이 말은 세한도에 인장으로 찍힌 말입니다.
"우선(藕船), 고맙네!
내 결코 잊지 않음세!
우리 서로 오래도록 잊지 마세!"
'장무상망(長毋相忘)'은 추사가 먼저 쓴 말이 아니라, 2천 년 전 한나라에서 출토된 와당에서 발견된 글씨입니다.
'생자필멸'이라는 말처럼. 살아있는 것은 모두 쓰러지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추사와 그의 제자 이상적이 나눈 그 애절한 마음은 이렇게 오늘도 살아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추사를 생각해 준 사랑하는 제자에게 추사는 세한도를 주면서 요즘 말로 가볍게 '영원불멸'이라 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안으로 다스려 '장무상망'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절함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당신이 외로울 때 힘이 되어줄 사람, 장무상망의 그 사람이 당신에게는 있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두어 명은 있어야 내 인생은 헛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함께 돌아보시죠?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장무상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를.
편지에서는 모두 쓸 수 없었지만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는 하지 않을 수 없어 몇 자 적습니다.
새벽편지의 대문그림은 국보 180호인 추사(秋史)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다.
문인화의 정수인 그림의 가치보다 이 그림만큼 아름다운 사연을 담은 것이 있을까.
바다 건너 7백 리 제주-
한양에서 2천 리 길이다.
이 고독한 섬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이제 잊힌 이름이었다.
5십 중반에 유배 온 그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한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유배에서도 최고형인 가시울타리를 치고 머무는 추사에게 전해진 아내의 죽음은 추사를 허무와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추사는 부마의 집안이다.
증조부가 영조의 딸인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정쟁'(사극 작가 신봉승 선생은 당쟁이라 하지 않고 정쟁이라 표현하는데 필자 또한 동의한다)은 병조판서인 아버지를 유배 보내고, 10년 뒤에는 추사도 유배가게 된다. 집안이 쑥밭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많던 친구들, 아는 사람들, 글씨를 부탁하던 권세가의 사람들, 제자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아무도 없었다. 절해고도인 제주에서 혼자 남은 그에게 고독과 외로움, 절망이 파도처럼 추사를 침식해 왔다..
이때 중국에서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의 선물 '황청경해'가 도착한다. 이 책은 청대 유교경학의 완결 편으로 모두 1400권,360 책이다. 수레에 실어도 한수레가 넘는다.
이 귀한 책을 중국에서 이상적이 보내 온 것이다. 중앙에서 밀려난 추사를 역관 신분으로 상당한 거액이 드는 이 책을 보냈다는 것, 유배 온 죄인에게 온정을 베푼다는 것은 자칫하면 그에게도 엄청난 형벌이 뒤따를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그 고마움을 추사는 세한도에 담았다.
그림 오른쪽 위로는 '찬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뜻의 '세한도歲寒圖'가 쓰여있다.
그 옆으로 "우선(이상적의 호)은 감상하시게, 완당(김정희의 호)"이라는 뜻의 '우선시상 완당(藕船是賞 阮堂)'이 세로로 쓰여 있다.
이 그림은 1845년, 세한도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한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해방 후 명필 오세창과 이시영 부통령의 배관기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세한도는 이씨 문중에게서 떠난 후 130여 년 동안 유전을 거듭했다.
1930년대 중엽, 추사에 미칠 정도로 몰두한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츠카 지카시에게 들어갔다. 그는 추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였다.
그가 모은 엄청난 추사의 자료는 전쟁 말기 귀국하는 후지츠카가 일본으로 모두 가져간다.
서예가 손재형은 현금 3천 원을 허리에 두르고 (아마 요즘 30억 원 정도로 추산) 후지츠카를 찾아가 양도를 요청하지만 후지츠카 역시 김정희의 '세한도'를 목숨처럼 아끼고 있었기에 양도할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6개월 동안 매일 찾아오는 손재형에게 감복하여 양도에 따른 사례를 거절하며, "추사를 따르는 동학(同學)으로 같은 길(同道)을 가는데 어찌 돈을 받겠느냐, 그것은 추사에 대해 예의가 아니다"며 후지츠카는 무상으로 세한도를 내어준다.
그 세한도는 이렇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피천득의 수필 '인연'처럼 없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손재형이 국회의원 출마하느라 모자라는 돈 때문에 담보로 잡힌 세한도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망 직후 후지츠카 교수는 죽는다. 미군정하의 일본에서 생활이 어려워진 후지츠카의 아들은 생계를 위해 그가 소장한 책들을 내다 파는데 그것은 훗날 정민 교수에 의해 하바드 대학에서 발견되고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책이 나왔다.
후지츠카의 아들은 생활에 시달리면서도 정말 소중한 추사의 자료들만은 내다 팔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그것을 얼마나 아꼈는지, 또 그것을 수집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놓지 않던 추사의 자료들- 후지츠카 교수의 아들은 꼭꼭 숨겨 가지고 있던 추사의 자료 등을 국내외 등 여러 곳에서 기증이나 판매를 부탁했지만 모두 과천미술관에 무상으로 기증한다. 과천은 추사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그래서 노과라는 호까지 있다.
후지츠카는 추사에 대한 최고의 안목으로 최고의 자료만을 모았기에 그 자료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후지츠카 교수의 아들은 무상으로 기증하면서 작품연구비로 1억 원을 내놓았다.
추사의 작품이 지닌 향기 때문일까? '세한도'는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냈다. 추사가 절망의 극한에서 애절함을 담아 그린 그림이 사람들에게 이어지면서 감동을 주는 사연을 연이어 만들어냈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보다.
추사는 육십이 다 돼서야 유배가 풀린다.
그러면서 유배길에 오를 때 들린 대흥사에서 한마디를 한다.
"조선의 글씨는 이광사가 다 망쳤다. 원교가 쓴 대흥사의 글씨는 내리시지요."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는 추사보다 한 세대 전에 시대를 풍미한 조선 후기 최고 서예가다.
"아직 원교의 글씨를 갖고 있다면 그 현판을 다시 거시죠."
해배길에서 추사가 아무런 설명 없이 되살린 원교의 글씨-
추사의 글씨로 세상을 다 덮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이 그에게 세상에는 다른 길도 있음을 알도록 넉넉함을 추사에게 주었던 것일까.
이 사건으로 추사에 대해 오히려 인간미를 더 느끼게 되니, 세월은 가도 사람과 그 마음은 남는가 보다.
기와를 막는 와당의 모습
대흥사에 있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