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길을 잃었다.
사이비 종교의 최순실과 거기에 꼭두각시로 조종당한 대통령 박근혜, 두 여자는 국민의 정신을 해체시키고 자존심을 붕괴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럴 때 현실의 미로를 헤매느니 잠시 문학작품을 통해 현재를 살펴보는 것도 냉정하게 사태를 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많은 작가들에게 정신적 영감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페스트>는 압권이다. 지금도 페스트 같은 현실적 재앙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최순실사태는 우리가 겪는 재앙인 것이다.
<페스트>의 내용을 보자.
평온하던 알제리 해안도시 오랑에서 쥐들이 갑자기 거리로 나와 비틀거리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상황이 곳곳에서 발생된다. 이어서 사람들도 이 집 저 집 가리지 않고 죽음을 당한다. 처음 몇 명의 의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현상이 ‘페스트’ 일 가능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페스트로 밝혀진다. 시 당국은 페스트를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한다. 조용하던 오랑에서 시민들의 집단적인 ‘감옥살이’가 시작된다.
현실적으로 박근혜를 하야시켜도 문제, 하야 안 시켜도 문제가 되기에 한국은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면서 집단적인 감옥 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다.
살다 보면 재앙은 모두가 다 같이 겪는다. 하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큰 장애를 만났을 때 보이는 인간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야당은 최순실 사태를 비난하며 거국 중립내각을 요구했다가 그것을 여당이 덜컥 받아들이자 이제는 야당이 주춤한다. 야당도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권력은 그 속성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병 자체가 저절로 멈추지 않는 한 법률에 규정된 중대한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그 병이 ‘페스트’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확증이 절대적이지 않는 이상 심사숙고가 필요하다는 것 등을 지적함으로써 사태를 축소하려는 생각을 한다.
최순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박근혜를 정신병의 일환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 속에는 그걸 들여다보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서서히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최순실의 비행은 구체적이지만 박근혜의 무능은 추상이다. 이게 어려운 것이다.지도자의 무능이 구체적 범죄보다 더 큰 해악임을 어떻게 알려주고 단죄할 것인가.
페스트의 발병 초기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와 유사했다. 불안과 망설임으로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처음 페스트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던 사람들도 점차 페스트가 현실로 다가오자 다양한 형태로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 도시에서 일어난 페스트라는 사태가 다른 고장에 사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확신하는 기자 랑베르는 자신의 연인이 기다리는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적극 모색한다.
최순실, 박근혜 사태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유층들은 이건 자신과 상관없는, 한국의 정치수준이 만든 한편의 코미디로 보고 있는 것이다.
코타르는 범죄자였다. 페스트가 오랑을 휩쓸기 전에는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불행했다. 그는 페스트와 더불어 모든 사람이 불행해지자 오히려 그 덕에 살맛이 난다. 페스트 때문에 경찰이 그를 쫓거나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어진 것이다.
검찰과 언론이 최순실에 집중하면서 그 빈자리에 살맛이 나는 인간들이 생겨났다. 그동안의 문제들이 잠시 유예된 것이다.
파늘루 신부는 어느 비바람 치는 일요일 설교를 통해 이 재앙은 사악한 인간들에 대한 신의 ‘징벌’ 임을 역설한다. 우리가 이 불행을 겪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재앙이 오히려 인간의 길을 제시한다’고 강조한다.
“이 사태에 사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주라는 거대한 곳간 속에서 가차 없는 재앙(도리깨)은 짚과 낱알을 가리기 위해서 인류라는 밀을 타작할 것이다. 낱알보다는 짚이 더 많을 것이며, 선민들보다는 부름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지금도 최순실, 박근혜 사태를 ‘신앙과 기도가 모자란 탓’이라고 신자들을 괴롭히는 목사나 신부가 있다. 왜 죄는 저들이 저지르고 그 회개와 반성은 순진한 백성들이 해야 한단 말인가.
의사 리유는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다’며 파늘루 신부의 유신론적 해석을 반박하면서 그 병고가 하늘이 내린 유익한 점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인간의 할 일은 우선 치료부터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신이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만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우는 것이 더 합당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박근혜 사태를 한심하게 보고 냉소하는 인간들,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말하는 인간들, 그래도 어떻게든 이 나라를 망가뜨리지 않고 해결해 보려고 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타루가 제안하는 자발적인 보건대 조직은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즉 악과 질병과 죽음을 동반한 세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려는 리유의 생각과 일치한다.
이제 페스트는 개인의 운명을 초월하여 ‘집단적 역사적 사건’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페스트에 대응하는 보여준 여러 가지 태도 중 리유가 주장하는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불가피하고 단일한 대응 방식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앙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단조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불행과 고통의 태도가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그것을 예리하게 느끼지 않았다. 또 절망에 대한 습관이 들어 버린다는 것은 사실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재앙에 맞서서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밀려들고 있는 탈진 상태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정서 같은 데에 대한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무성의에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이 도시에서 생긴 사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는 나머지 탈출의 방도를 집요하게 찾고 있었던 기자 랑베르는 페스트와 싸우는 사람들을 돕다가 태도가 돌연히 바뀐다. 이곳을 떠난다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그가 그 행복의 실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 임을 깨닫는다.
파늘루 신부는 표면적으로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한 어린애가 죽어 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그날부터 그는 변한 것 같았다. 그의 ‘초월적 태도(페스트를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인다는)’에도 불구하고 랑베르가 떠날 경우 대신하여 보건대에 참여하기로 약속한다.
오통 판사의 아들이 결국 페스트의 고통에서 신음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미처 죄를 지을 사이조차 없었던 이 어린아이는 대체 무엇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이라 말인가?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리우는 자신의 팔을 잡는 신부에게 격렬한 어조로 내뱉었다.
파늘루의 두 번째 설교, 청중들은 그의 말투에서 주저하는 빛을 발견한다. 이제 그는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들’이라고 말한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들’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이 나라에 올까?
페스트가 마침내 물러갔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지하실이나 트렁크에 같은 것들 속에 살아남아서 언젠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라에는 페스트가 왔다. 이 재앙을 어떻게 해결할지, 어떻게 해야 물러갈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아무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추신:
페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40년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북부 해안의 작은 도시 오랑(Oran)에서 갑작스럽게 페스트가 발생한다. 그에 따라 외부와 격리 조치가 취해지면서 오랑 시는 외부와 단절되고 시민들은 고립된다. 그렇게 외부로부터 고립된 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씩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막장 상황이 1년 동안 지속되면서 드러나게 되는 인간 존재의 실존을 철학적으로 다뤘다.
주인공이자 의사인 리유, 그의 협력자인 말단 공무원 조제프 그랑, 기득권층 출신의 반항아 장 타루를 중심으로, 오랑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음에도 결국 떠나지 않고 리유를 돕기로 결심하는 파리에서 온 신문기자 랑베르, 페스트를 타락한 인류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주장하는 파늘루 신부, 페스트로 야기된 혼란 상황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챙기는 코타르 등이 등장, 모두에게 닥친 결코 피할 수 없는 재난적 운명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페스트는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재난소설, 재난영화 등 장르의 효시이다.
더불어 1992년에 영화로도 나왔으나 그야말로 묻혔다. 불의 전차,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제작자로 유명한 데이빗 퍼트냄이 제작했는데 카뮈의 후손들은 영화화를 반대하여 엄청 오랫동안 설득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