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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Dec 12. 2016

여자의 자유는 '돈과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여자를 위하여

여자가 작가가 되려면 필요한 두 가지는 무엇일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과 ‘약간의 돈’이다.”

     

‘(당시의) 여자는 가난하고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회의 편견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한마디로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

영국 소설가인 그녀는 작품보다 이름이 더 유명한, 독특한 작가다.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처럼, 버지니아 울프도 1941년 3월 코트 주머니에 돌을 채워 넣고 우즈 강을 걸어 들어가 생을 문학적으로 마감했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릴케가 파상풍으로 죽었든, 울프가 우울증으로 죽었든 그 구체적 사실을 사람들은 오히려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울프의 소설을 직접 읽어본 사람보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같은 영화(원작은 에드워드 올비가 쓴 동명의 희곡)나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속 한 구절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울프는 우리 사회에 알려졌다.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이름을 알리고, 이 시를 라디오로 세상에 알린 박인희도 유명해졌다. 박인환은 사흘간 술을 마시다 죽었다. 고작 서른 살에. 이 시를 소개해야 울프에 대한 이해가 빠르기에 전문을 싣는다.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의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부릅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할’ 정도로 그녀의 삶이 정말 낭만적이었을까? 그녀는 세상을 살면서 여성이라는 존재를 자각하여,  ‘상심한 별이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질 때’를 느낀 여자로서의 인생을 힘들게 걸어왔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립을 피하다 시들어 가는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며 우리는 정녕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시인은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버지니아 울프는 정말 그토록 원하던 목마를 타고 떠났을까.


버지니아 울프가 재조명받는 이유는 흔히 ‘여성주의’라고 번역되는 페미니즘에 대해 울프는 자각을 한 선각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성이 자기만의 글을 쓰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과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이것이 자유로운 여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보봐르가  <제2의 성>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여자로 길들여질 뿐이다." 라고 한 말은 현상을 파악한 것이지만, 울프의 탁월함은 자유로운 여자의 본질과 조건을 간파한데에 있다.  


대학은 물론 정규학교를 밟지 않은 울프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통해 그리고 소설을 발표하면서 그 지성과 문재를 인정받았다.그녀는  마침내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으로부터 ‘여성과 소설’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요청받는다.           


울프의 여성 차별의 본질에 대한 민감하고 확실한 인식은 이 강연을 기초로 만들어져 훗날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평가되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1929)을 발표한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와 이해가 있었고 울프 역시 중상류층에 속하는 작가였지만, 정작 그녀가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준 건 숙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그래서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이 그녀의 창작을 지탱해준 재정적 바탕이 된다.      


울프는 자신의 사례를 들어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일정한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울프는 자신의 생각을 입증하기 위해 가상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에게 똑같이 뛰어난 재능을 갖춘 여동생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주디스로 하고. 오빠 셰익스피어가 학교에 다니면서 오비디우스 등 희극 책을 읽을 때 주디스는 오빠만큼 모험심이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부모가 보내지 않아 학교에 가지 못했다. 당연히 문법과 논리학을 배울 수도 없었고, 집에서 오빠의 책이라도 집어 들라치면 책을 읽는 대신에 스타킹을 꿰매거나 스튜가 끓는 거나 잘 보라는 야단을 들었다. 부모가 정해준 혼처를 마다하고 주디스는 연극에 대한 열망으로 집을 나간다. 하지만 극장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훈련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감독의 아이까지 갖게 된 주디스는 한겨울밤에 목숨을 끊고 길가에 묻히게 된다. 울프가 보기에는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셰익스피어와 동등한 재능을 갖고 있던 여성이 겪었을 법한 생애다.     


이것이 과연 당시만의 일일까. 여배우나 작가를 지망하는 재능 있는 여자들이 오늘날에도 겪는 일이 아닐까.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여성의 재능을 사장시키고 여성을 가난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창작은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만 지적 자유는 다시 물질적인 것에 의존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여성은 항상 가난했고 시를 쓸 기회가 없었다. 여성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약간의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녀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다.      


문학사를 장식하고 있는 거장들의 목록에서 여성의 이름이 그토록 드문 것은, 여성의 열등함이 원인이 아니라면, 여자들에게 재능을 발휘할 사회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울프의 생각이다. 그것을 80년 전에 대학도 나오지 않은 여자가 독서를 통해 스스로 자각하여 말했기에 대단한 것이다.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은 자기만의 방도 안정된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쓴 희귀한 사례였다. 돈도 자기만의 방도 없었지만, 정부에서 주는 기초생활비에 의지해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남자들이 만든 벽을 부수는 여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걸 보면 궁극적으로 여자를 자유롭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독서와 교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목마와 숙녀>에서 노래하듯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여자의 현실을 자각했기에,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나가야 할 길을 보여준 울프의 도전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린 시절 행복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이복 오빠들의 성추행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당시의 보수적 분위기 탓에 이 일을 그저 덮으려고만 하는 부모님의 태도에서 그녀는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버지니아 울프는 극심한 우울증에 걸리고 만다. 그 후 버지니아가 얻은 마음의 병은 평생 동안 그녀를 괴롭힌다.  정신질환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하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버지니아는 매일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병으로 몸져누운 순간에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렇게 울프는 병과 싸우면서도 최고의 작가가 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의 여성의 현실이 아직도 울프가 80년 전에 말했던 바에 미치지 못한다면, 여자는 자기만의 방과 돈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래야 자유로운 여자로서의 인생을 얻을 수 있다. 두터운 현실에 막혀 여자로서의 자유를 포기하고 길들여지는 ‘처량한 목마 소리’ 대신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실이다.      


울프는 고독했던 삶을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 왜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일, 중요한 인생에는 오히려 무관심한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인생을 바꾸는 가장 쉬운 길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었다.        


그녀가 강으로 들어가 투신자살을 하자 모두 남편의 탓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녀의 유서와 일기장은 진실을 알려주었다. 남편이 얼마나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는지를.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유서 마지막 글귀다. 그녀가 꿈꾸었던 자유로운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울프의 유서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자유로운 영혼이 가는 길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우즈 강으로 돌멩이를 호주머니에 가득 넣고 걸어간 버지니아 울프처럼.                 





추신: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된 두 개의 말로  그녀에 대한 헌사를 대신합니다.   


“때로 나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책을 읽는 것에 천국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버지니아 울프     


“사람들이 현재를 견딜 수 없을 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과거를 회상하거나 아니면 미래를 바꾸려고 하지. 당신이 무언가를 바꾸려고 한다면 부딪쳐! 부딪쳐! 부딪쳐!”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대문과 본문의 사진은 모두 버지니아 울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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