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짓말을 못하네. 약속을 못지킬 상황이 왔을뿐
"얼굴이 두껍고 속이 시커머야 성공을 한다."
이 말은 청나라 말, 교수 출신인 이종오(李宗吾)가 주장한 후흑학(厚黑學)의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얼굴이 두껍고 뱃속이 시커먼 사람'이 출세하고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후흑의 모습을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봅니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는 결정적인 도움은 이른바 'DJP연합'이라는 JP의 협력이었습니다.
DJ는 김종필 총재에게 집권 2년 후 내각제를 하겠다며 문서까지 조인했습니다.
이때 협상을 맡은 이가 김용환 정책위의장입니다. 그는 DJ에게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거짓말 잘하는 총재(DJ)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정계은퇴까지 번복한 그의 말을 못 믿겠다는 말에 DJ는 역사에 남는 말을 합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왔을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후흑의 모습은 계속됩니다.
대통령을 '그년'이라고 표현한 야당의 원내대표는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만나며,오타였다고 말합니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대통령은 '헬조선'이라고 젊은이가 원망해도 외국이나 다니며 총선에 측근을 심으려고 간섭을 합니다.
사위가 마약을 해도 여당 대표는 농촌 지역구의 사수를 외칩니다.
민생은 어려워도 여야는 역사책 싸움을 합니다.
그렇게 역사를 사랑하고 역사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경제가 어렵고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분노를 표출할 곳을 찾지 못했을 때 이럴 때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고 역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 정치인들을 어떻게 심판했는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얼굴이 두꺼워도 속이 시커머도
정말 국민을 제대로 생각하고 미래를 여는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정치인이 없다면 정말 이 나라는 희망이 없는 '꼴등국가'입니다.
후흑학에 대해 보충합니다.
이종오는 당시 청나라를 쇠퇴시키는 유교에 대해 불만을 느껴 공자를 존경하고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이름을'종오(宗吾)'로 바꾼 독특한 인물입니다.
후라는 얼굴을 의미합니다. 후안(厚顔), 즉 낯가죽이 두껍다는 뜻입니다.
겉(얼굴)으로는 감정(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으며, 흑은 흑심(黑心)으로 뱃속이 검어 그런 걸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 염치없는 것을 말합니다. 낯이 두껍다는 표현이 꼭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종오에 의하면 공자, 맹자 등 성인들도 나름대로 후흑학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이종오는 후흑학으로 역사를 봅니다.
조조와 유비를 후흑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보잘것없는 출신의 유방이 어떻게 성공하여 천하를 세웠으며, 그 힘이 산을 뽑는다는 초패왕 항우가 왜 실패하였는지를 낯가죽의 두꺼움과 뱃속의 시커먼 정도의 차이로 후흑의 학설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후흑학은 중국 역사의 인물들을 예로 들면서 영웅호걸이라 불리고 중국 역사의 한 시대를 장식했던 인물들이 한결같이 낯가죽이 두껍고 뱃속이 숯덩이처럼 검어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하려면 일단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 또한 뱃속이 시커머야 한다. 허다한 영웅호걸, 왕후장상, 내로라하는 성현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후흑학을 통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이 있었던가?”
이종오의 '후흑 3단계설'에 의하면 “기차의 입석표로 남의 자리에 앉고서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으며, 임자가 나타나면 태연히 일어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후흑의 기초가 갖추어진 셈입니다. 여기에 수련을 쌓아 낯가죽이 두껍고, 뱃속이 검은 것을 타인이 간파할 수 없게 되는 무형무색(無形無色)의 지극한 경지에 올라야 후흑학은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종오가 후흑학을 주창한 후, 수 많은 사람들이 제자를 자청하여 집 앞이 성시(成市)를 이루었고 그들에게 후흑의 도를 전수해 주었다고 하나 정작 그 자신은 얼굴이 두껍고 복심이 검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관청의 돈 챙기는 자리에 있는 책임자에게 자신의 봉급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는가 하면, 그 책임자가 될 뻔하다 취소되었을 때에는 집에 돌아갈 노자마저 떨어졌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후흑학'에 구속되어 위신과 체면 때문에, 후흑학을 만들고도 생전에 후흑의 도를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깨닫는 것,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가 매 번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마다 스스로 "이렇게 하면 내가 후흑학을 실행한다고 사람들이 말들 하지 않을까?"하며 걱정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는 후흑이 입으로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학자가 될 사람과 정치를 할 사람은 따로 있나 봅니다.
후흑학이 세상에 떠들썩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을 즈음, 한 관리가 박백학'(薄白學: 낯가죽이 얇고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란 글을 써 이종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말끝마다 도덕 운운하며 후흑학에 대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박백학을 주창하던 그 관리가 탐욕과 횡포한 사실로 인해 목이 잘려 성도성 공원의 기념비 위에 효시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후흑학은 지금도 대만과 중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후흑학에 정면 도전하여 반(反) 후흑학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생겨났고, 반후흑학을 뒤집는 반반후흑학이 나왔으며, 또 그것에 반대하는 반반반후흑학이 제기되었을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