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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Oct 05. 2015

나는 내 운명

하늘이 내게 준 길, 천명(天命)은 무엇인가

우리말에서 중요한 것은 대개 한 글자다. 하나밖에 없거나 소중한 것이다.


“나, 옷, 집, 밥, 너, 몸, 눈 , 귀, 입, 손, 쌀,  논, 밭, 흙, 일, 길, 말, 글, 뜻, 벗, 삶, 앎, 해, 달, 별, 비, 숨, 꿈, 꽃, 빛, 돈…….”


한 글자 중에서도 특히 의미 있는 말은 ‘길’이다.

 길은 여러 사람이 가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하지만 혼자 가면서 만드는 자신만의 길도 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기의 ‘길’을 걸어갈 때다. 그래서 자기의 길을 찾은 인간은 아름답다. 그 길을 가다 목표를 다 이루지 못하고 중간에 쓰러진다 해도…….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 바로 운명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출생이라고 한다.

 출생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명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뜻이 없다.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 사람이  태어나  말을 하고 대, 소변을 가리는 데는 대략 3년이 걸린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옆에 막을 짓고 3년을 지내는 시묘살이를 한 것이다. 부모님에게 뼈와 살과 피를 받고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게 해 준 그 은혜와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출생, 즉 태어난 것 자체만으로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의 길을 찾아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달라진다. 일을 통해서 한 인간의 생명이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인간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길을 찾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을 ‘입세(入世)’라고 한다. 자신의 길과 일을 찾을 때,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과 함께 천하를 주유하던 3천 명의 제자들에게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入世)’ 자신의 일을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자기의 길과 일을 찾아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이 ‘입세(入世)’라면, 그 일을 하면서 공(功)을 세워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 ‘출세(出世)’다. 출세와 성공의 차이는 출세가 이름을 얻는 것이라면, 성공은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된 것과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다르다. 출세는 했어도 뜻을 이루었느냐 이루지 못했느냐의 차이다. 그 의미나 평가는 엄청나게 다르다.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에서 연말에 시상하는 ‘자랑스러운 00대인’은 출세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직위와 관계없이 뜻을 이룬 사람, 성공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세했거나 성공한 사람이 목숨이 다해 세상과 이별하는 것은 사망이 아니라 별세(別世)라 부른다. 사람다운 삶을 살았기에, 세상과 하직하는 죽음도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본질은 무엇이고 인생은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 삶의 영원한 과제이자 미스터리요 가장 철학적인 화두다. 인생이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한 답은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찾게 되는 것이다.



가수 김국환은 <타타타>라는 노래에서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라고 했다.

 알 수 없으니 사는 것이다. 인생의 그 의미는 살면서 찾는 것이다.


 채현국 이사장은 광산업을 통해 세금을 10위안에 들 정도로 많이 내는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사업이 어려울 때 굴을 파서 생활할 정도로 고생을 해보았기에 민주화운동 때 투옥되거나 도피하는 사람을 뒤에서 도왔다. ‘거리의 철학자’인 그는 인생을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처음엔 누구도 인생을 알 수 없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다. 삶이란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다만 그저 아는 게 아니다.

수많은 갈등과 반복, 그 과정에서 피 터지게 싸우며 우리는 삶을 사랑하게 된다. 인생이 때로 공허하고 저주스러운 것은 그만큼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반증이 된다.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면 이제 운이 트인다. 단맛이든 쓴맛이든 삶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실패를 연속하는 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다”       


인생길은 어렵다. 그 길에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다. 노래 <타타타>에도 나온다.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 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인생길은 꽃길만이 아니다. 눈길도 빗길도 진흙탕 길도 있다.

 눈보라가 날리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다.

지금은 꽃길을 걷더라도 자신의 인생 앞에 놓인 길이 꽃길이 계속될지 뾰족뾰족한 자갈들이 사방에 깔린 길인지, 발이 쑥쑥 빠지는 진흙탕길인지, 가파른 급경사 길인지, 앞에 벼랑이 기다리고 있는 길인지 누구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앞을 분간할 수 없도록 퍼붓는 장대비를 만나기도 하고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큰 태풍도 만나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을 다 삼켜버릴 정도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아래를 걸어야 할 때도 있다. 도적떼를 만나거나, 함께 걷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 얼마나 더 가야 평탄한 신작로가 시작되고 꽃길이 나올지 인생길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비와 태풍은 언젠가는 지나가고 멈춘다. 빗길과 눈길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인생길에서 눈비를 맞으며 눈길과 빗길을  걸어봐야 인생의 의미와 그 깊이를 깨닫게 된다.

 대개 진정한 성공은 쓰라린 실패를 겪고 나 뒤에야 시작된다.


인생길에서 겪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이 말은 다윗 왕이 반지에 새긴 글귀이다.


왕은 보석세공인에게 명령하기를

“내가 전쟁에서 승리로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며

내가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좌절하지 않으며,

내 자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반지에 새기라”고 했다.


그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고생하던 세공인은 결국 솔로몬 왕자의 도움으로 다윗 왕의 반지에 승리에도 교만하지 않고 절망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말,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새겼다.


인간이 겪는 어떠한 기쁨이나 고난도 결국은 한 때, 모두 지나가기 마련이다.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존재이다. 그 희망이 환난의 삶을 극복할 힘이 되고 그것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좌절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승리 속에서도 교만에 빠지지 않고 성공 속에서도 관용을 가질 때 인간은 비로소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사람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 속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욕망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정한 부처의 길은 저자거리에 있지만, 저자거리에서는 해탈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지혜가 엔진이라면 감정은 가솔린”이라고 말했다.

 지혜가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해도 감정에 따라 언제든 활활 타오르기 때문에 인생길은 아침과 저녁으로 바뀌는 것이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지식을 더하면 근심도 더해진다고 했다. 아는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깨닫지 못한다면 인생길은 참으로 멀고 험하다. 작가 최인호는 <길 없는 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생사의 밤길은 길고 멀어라.


누구나 행복한 인생,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생길이 어려운 것은 재능의 부족도 아니요 주어진 환경의 어려움 때문도 아니다. 사람들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사단칠정(四端七情), 즉 측은이 여기는 마음,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 잘 잘못을 가리는 마음이 자기의 주변과 인생길을 휘젓는다. 거기에 인간의 감정인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휘발유로 부어진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사랑과 미움, 욕망이 뒤섞이면서 인생길은 굽이굽이 고갯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의 ‘불타는 집’에서 고통으로 허덕인다고 하였다. 이처럼 ‘감정과 어리석음이 불타는 집’에서 허덕이기에 인생길은 잘 사는 것도 어렵고 제대로 사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길에서 제대로 사는 것은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이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나만의 길을 알고 그 길을 찾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천명을 받았다. 하늘이 나에게 준 사명, 즉 천명(天命)을 알고, 자신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고 행복한 인생이다.


그것은 단순히 배워서 되는 지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는 것은 느끼는 것보다 못하고

 느끼는 것은 경험하는 것보다 못하고

경험은 깨닫는 것 보다 못한 것이다.



인생은 요리와 같은 것이다.

한 가지 맛으로 요리가 만들어지지 않듯이

단맛, 쓴맛, 매운 맛, 신맛, 쓴맛이 뒤섞이고 버무려 진 것처럼 인생도 이 맛 저 맛이 뒤섞여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의 인생이든 한 가지 맛으로 이루어진 삶은 없다. 단맛으로만 이루어진 사탕처럼 인생이 달콤하게 이루어졌다면 좋을 것 같지만 이런 인생길은 있지도 않지만 한가지 맛으로 이루어 진 인생길은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


그래서 시대의 어른이라는 채현국 이사장은 ‘쓴 맛이 사는 맛’이라 했다.  쓴맛을 모르면 사는 것을 모르는 것이고 인생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진정한 성공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후에야 시작되듯이, 인간은 인생의 처절한 고통을 겪은 뒤에야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든지 뭔가를 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깨닫는다면 내부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다.

 겨울공화국시절, 시대를 깨우는 차가운 화살을 쏘았던 저항시인 김지하와 지금의 그는 모습과 언어는 다르다. 고난을 넘어선 거인을 보는 것이다.


28년간의 감옥생활을 끝낸 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후 보복이 아니라 화해의 남아공을 만든 만델라의 얼굴도 그 모습이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고난은 인간을 끊임없이 연단시켜 새롭게 만든다. 인간에게 있어서 고난은 <데미안>에서 말하듯이 새가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오는 고통이다.   

맛 중에서 쓴맛이 절정의 맛이듯, 인생은 깊은 맛은 쓴맛에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깊은 중독성을 갖는 맛은 모두 죽음의 향기를 갖고 있다. 탄산가스가 사라진 콜라에서 낙엽의 냄새가 나듯 죽음으로써 다시 새로워지는 효소가 그렇다.


 죽음을 넘어서는 맛, 그 맛이 절정의 맛이듯

인생 또한 육신의 처절한 고통을 넘어설 때만이 인생의 깊음을 느끼게 된다.


 “좋은 포도가 반드시 좋은 포도주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말처럼 죽어야 다시 살아나는 변화는 꼭 포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같은 고통이 인생을 새롭게 한다.


인생길이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맹자의 말이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지치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 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래서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이 나왔다.

 옥이나 돌을 쓸모 있게 하기 위해서는 자르고 쓸고 쪼며 숫돌에 갈아야 한다.

인생길의 어떤 분야든 절차탁마가 없으면 쓸모없는 단순한 옥이나 돌로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절차탁마를 일으키는  힘은 바로 고난이다.

바다가 늘 잔잔해서야 어디 바다라 할 수 있을까.

파도가 쳐야 바다다. 인생도 파도가 있어야 인생인 것이다.


하늘은 어찌하여 나를 세상에 보냈는가.


천명(天命)은 하늘이 나에게 내린 명령이다.


 천명은 ‘운명과 사명’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다.


 내가 그 길을 가야할 운명과 그 길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천명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부귀(富貴), 즉 권력과 재물과도 관련이 있다.


 옛부터 지도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다스린다고 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천명을 받아 임금이 되는데

그 뒤 자손들이 덕을 잃으면 천명이 떠나간다고 했다.

그래서 황제는 하늘이라 부르지 않고

하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다스린다고 하여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대통령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낸다’고 말한다.


지도자는 천명을 받아야 한다.

큰 부자 또한 천명을 받아야 한다.


 <장자(莊子)> 제물론편(齊物論篇)에는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으로 이룰 수 있지만

 큰 부자는 천명으로 이루어진다(大富由命小富由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석학 피처 드러거는 세계 부자의 3%를 제외하고는 그 부가 3대를 이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천명을 지키고 사람을 지키고 자신을 지켜야 부와 권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사람을 소중히 하면 권력과 부가 오지만 함부로 하면 있는 부와 권력도 없어진다. 자만은 인간에게 권력과 금수저를 빼앗아 간다. 천명도 떠나가는 것이다.      


인생길에서 자신의 천명을 미리 알고 그에 맞게 행하는 것은 가장 큰 지식이자 큰 깨달음이다.


 스스로 자신의 길인 천명을 안다면

무리하지 않기에 실수도 줄일 수 있고,

세상이라는  ‘불타는 집’에서 겪을 괴로움도 적다.


 인생의 시간이나 재능도 탕진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천명을 알게 된다면, 천명의 궁극인 가치있는 삶,

 행복한 삶, 성공한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공자는 만년에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들으면  그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공자가 스스로 쓴 자신의 인생이자, ‘자기소개서’다.


공자도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천명을 깨닫게 되었다.

천명을 깨닫는 것은 자신의 운명과 갈 길, 해야 할 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깨닫는 것이고

 깨닫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행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알 때

사람은 사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말 한 것이며,

공자같은 성현 또한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천명을 알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알고 찾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서양철학의 본문’이라고 불리우는 플라톤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 겪는 좌절과 방황을 넘어서서 마침내 철학의 본질을 깨달았다.


철학은 체험이자 운명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운명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알고 운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야할 그 길을 아는 것이다.


 현세에서 자기가 가야할 길이

지옥 같은 고통이라도 그 길을 가야만 한다면 가야한다.


그것을 알기에 인간은 때로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조차 모두 같은 건 아니다.

태산 같은 죽음이 있고 깃털 같은 죽음도 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지식은 사람을 알고 성찰하는 ‘지인지감(知人之監)’이지만

그 보다 더 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일이나 전공, 돈벌이, 명예욕 등 욕심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교육제도가 만든 함정이다.

 성장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고 고민해야 할 특별한 필요가 없었고, 요청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문제보다는 영어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게 요구되었기에 그렇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대학을 갈 때나 자신의 적성을 생각하지만,

이 또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기 때문이다. 직장 선택도 결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쌓여 있다가

어느날  인생길에 바람이 불어오면 전체가 흔들리면서 갑자기 한꺼번에 폭발한다.


연봉 10억을 받는 삼성전자 최연소 이사가

승진이 누락되었다고 이를 비관하여 자살을 하거나

재계 5위인 롯데그룹이 형제의 경영권 다툼으로  그룹전체가 흔들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갑자기 벼락치듯 왔기에 지진이 난 것처럼 인생전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남들과의 경쟁만 생각했지,

정작 자신이 누구이고 운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기에

받는 숙명적인 고통이다.


그래서 철학자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 채 죽어가는 게 안타깝다.“


우리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본질은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티끌 하나에 우주가 깃들어 있고, 오동잎 하나로 천하의 가을을 안다는 말처럼

깊이 관조하고 깨달았을 때야 자신의 본질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려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아는 사람이 있다.

큰 노력이 없이도 하늘이 자기에게 준 천명을 아는 사람을 타고났다고 하여

 ‘생이지지(生而知之)’라고 한다.


 조상의 덕과 전세의 선(善)이 쌓인 것이다.

 모차르트가 그랬고 피카소가 그랬고 3살 때 시를 쓴 김시습이 그랬다.


 생이지지의 인물들은

자기가 가야할 인생의 갈 길을 7살 이전에 알고,

그 재능이 표출된 것이다.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배우고, 깨달으며 안다.


 배워서 아는 사람이 ‘학이지지(學而知之)’다.

공자 또한 배워서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배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


그래서 <논어>의 첫 글자가 배울 학(學)인 것이다.

인생길이 막힐 때 배우는 사람,

 막힌 데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배우면서 길을 찾으려는 사람이

바로 ‘곤이학지(困而學之)’다.


 인생의 큰 성과들이 대체로 이런 곤이학지에서 이룬 결과들이다.

어려움이 인간을 크게 만드는 것이다.


처칠은 정치에 투신한 지 30년이 넘어서야 자기의 갈 길을 알 수 있었다.

제갈공명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닌 줄 알았지만,

유비의 정성어린 삼고초려 때문에 은거의 삶을 깨트렸다.

천명이 아님을 알아도 나서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조선의 명군인 성종도 아들이 폭군 연산군이다.

역사상 폭군은 처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나라를 망하게 한 망군(亡君)이나 혼군(昏君)들도

젊어서는 대체로 유능하고 학문을 가까이 했다.


수양제나 의자왕도 마찬가지다.

아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들도 몰랐을까.

다 알면서도 주색에 빠지고 복수에 빠지고 미망에 빠져 무너진 것이다.


천명을 모르면 어떤 자리에 가든 결국 불행해 지는 것이다.

 뜻을 이루는 성공은 이처럼 어렵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모르면서 방향도 모르고 가는데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한비자>에는 이것을 지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 돼지를 팔러가다 사람을 만났다.

그는 마침 돼지를 사려는 사람이었기에 돼지 값을 물어보았지 돼지를 팔려는 사람은 빨리 시장에 가야한다고 대답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가 팔려는 돼지를 사려고 해도 시장에 가야되기에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처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제대로 잡는데 있다.

결코 속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운명의 바람은 자신이 탄 배를 어느 항구로 이끌지 모른다.


그래서 옛부터 천명과 천운을 알기 위해 주역을 공부하고 관상을 공부한 것이다.


하나의 사례를 들겠다.


조선시대 초기 조준은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이 능히 나라를 다스릴 그릇임을 알고

“이 책 한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며 제왕학이 담긴 <대학연의>를 권했다.


 이 책은 성군 세종대왕도 100번을 읽었다는 책이다.


이방원이 세자에 책봉되지 못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정안군(이방원)은 거사에 함께 하자고 조준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

 한동안 그는 할 일이 있다고 이방원이 보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삼족이 멸할 수도 있는 흥망의 갈림길에서 조준은 주역을 보았다.

천운이 이방원에게 있는지, 지금 자신이 나서는 것이 천명(天命)인지 아닌지,

또 지금이 바로 움직여야 할 그 때인지를 주역을 통해 살핀 후에야 조준은 거사에 동참했다.


그 거사는 성공하여 조준은 훗날 영의정을 지냈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이처럼 개인과 나라의 운명까지도 바꾼다.  


이 세상에는 오직 자신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이것은 ‘운명의 길’이다.

사람마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갖고 태어나는데

그 길을 찾으면 죽을 때 후회하지 않고

찾지 못하면 죽을 때 후회하며 평생 미망에 빠져 헤매는 것이다.


 운명의 길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의 뜻을 알아 그 길을 찾아가는 것 뿐이다.

그래서 운명의 길을 모르는 것은 한밤중에 불도 없이 길을 가는 것과 똑같다.


 운명의 길은 인생의 성패와 직결된다.

그 길을 얼마나 잘 걸어갔는가에 따라 자신의 존재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유령이 나오든 말든 자기의 길을 나아가라.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괴로움도 행복도 만날 것이다.

 진정 자신으로 실존하고 싶다면, 지금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충실히 걸어가야 한다.

그 길이 바로 나만의 길이며,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

자기가 지고 가는  그 짐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이자 자신이 세상을 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는 거,

그런 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런 짐을 지고 갈 능력이 당신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 거부하고 싶은,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등에 지고

길을 열어 갈 힘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이다.


남보다 더 힘든 삶, 팔자가 센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주어진 짐, 그것은 운명이다.

곱사등이에게서 혹을 제거하는 것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제거하는 것이다.


운명은 이렇게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다.

자신의 등에 지어진 짐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길인 그 ‘운명의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오는 운명의 부름을 잘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헬렌 s 정은 <철학은 운명이다>라는 책에서 이를 명쾌하게 해석한다.


내가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니체의 말대로

" 진리는 없을뿐더러 인간사의 모든 것은 해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해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애플을 만든 스티브 잡스도 여러 기술을 새로 해석해 통합시켰을 뿐이다.

 해석이 이처럼 중요하다.  


플라톤은 그의 명저 <공화국>에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영혼은 고유한 다이몬을  부여받으며

그 영혼에 어울리는 육체와 부모, 공간, 환경을 정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른바 ‘망각의 강’을 지나며

그 사실을 다시 태어날 때 잊어버려 이해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정했다는 것이다.


내가 불만일 수도 있는 부모나 육체,

환경은 이미 내 영혼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에르 신화를 들려주면서,

그 사실을 알고 깨달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더 잘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에게 전해오는 ‘운명의 부름’이라는 것은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로마인은 게니우스(Genius),

그리스인은 다이몬, 기독교인은 수호천사, 불교인은 업(業),

 도교에서는 보호령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영혼의 전달자이자,

자신이 쌓아 온 인연의 축적으로 개개인과 함께 하면서 천명을 깨닫고 자신의 할 일을 찾도록 돕는다.


인간의 삶은 거듭된다는 ‘윤회(輪廻)’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다.


기독교도 초기 성경을 만들 때나

기독교 논리를 확립할 때 윤회론을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해

공론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윤회가 조금씩 밝혀지는 것은

우주의 근원이라고 할 인간의 정신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면서부터이다.


  유명한 프랑스 작가를 최면과 정신분석으로 접근해 보았더니

그에게는 140번의 삶이 윤회하였고,

그중에서 의미있는 삶은 10개 정도였다고 한다.


인생은 계속 윤회되고 현재의 노력은

현세가 아니라도 내세에서 꽃을 피우기에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깨달아 넘어서지 않는 한,

이른바 ‘불타는 집’에서의 거듭되는 고통의 연속이 인생인 것이다.       


이처럼 인생은 전세(前世)의 업과

현세(現世)의 인연, 노력이 합쳐져 내세(來世>를 만드는 것이다.


세계적인 석학 제임스 힐먼은 저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에서

플라톤의 에르 신화를 3가지로 정리하는데

이는 동양에서 말하는 천명(天命)과도 맞닿아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을 아는 방법이다.

 

첫째, 운명의 부름을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사실로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운명의 부름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

셋째, 여러 가지 우연한 사건과 사고가 자신에게 일어난 이유를

깨달으려면 그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난 공통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하늘은 당신이라는 고귀한 존재가

세상에 온 이유를 알리고 깨닫게 하기 위해

심적 고통과 자연적인 충격, 사건들을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늘이 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사람이든 일이든 사건이든 모두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만나게 되는 사람들로부터 ‘그 의미를 찾아내라“고 제시한다.


인생을 잘 살고 싶다면

가장 필요한 것이 관찰의 힘이고 깨닫는 것이다.


나비의 날개짓 하나가 태풍을 몰고 오듯이

한 인간의 깨달음이

온 우주를 진동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일생동안 별처럼 빛나는 때’,

그 때 하는 일이 세상을 바꾼다.

 그 빛나는 때란 자기의 천명을 깨닫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행동할 때인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당신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려면

자신의 영혼의 전달자인 다이몬과 끊임없이 대화하라는 뜻에서

소크라테스는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알고 찾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찾으려는 것도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주겠다.”


빛나는 것은 황금만이 아니다.

 자신을 아는 것은 황금보다 더 빛나는 엄청난 비밀을 아는 것이다.    


‘인생찬가’를 쓴 시인 롱펠로우는 “인간은 누구에게는 두 명의 천사가 있는데 하나는 생명의 천사요, 또 하나는 죽음의 천사다”라고 강조한다.


어떤 사람이든 그를 보호하고 지키는 그 수호천사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영계로부터 함께 온 다이몬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다이몬과 죽음 직전까지 대화를 할 정도의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수호천사 중 하나는 우리를 운명의 길로 이끌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파멸로 유혹하는 것이다.


두 천사는 우리가 관심을 많이 주는 대로 우리를 이끌면서 운명을 변화시킨다.


 동양에서 말하는 수호령과 똑같다.

 수호령은 선악의 형태를 띠며 그 주인이 관심을 갖고 결정하는 것을 따른다.     


지금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 대하여

비관하거나 노하지 말고 달게 받아들이면

신기하게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것이 인생의 묘미다.


니이체는 통념과 상식을 부셨기에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리는데

그는 ‘운명의 길’을 찾아 허덕이는 우리에게 조언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


 통상 운명애(運命愛)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내 운명이 하늘의 뜻에 닿아있는 이상

인간은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그것을 겪고 나서야 인간은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운명은 필연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닥쳐오지만,

이에 인종하는 것만으로는 창조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인 천명(天命)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천명을 알게 되면

내부에서 엄청나게 강한 확신이 밀려오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귀에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기 신념에 도취되어 세상과의 소통이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다른 사람의 비판과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고

 세상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자가 말하는 이순(耳順)의 경지가

 바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다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귀를 열어놓는 경지인 것이다.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세상에 빛을 남기는 것이다.


인생이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 앞에는 각자의 길이 하나씩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철학자는 인생길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당신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얼마나 잘 걸어가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묻지 말고 그저 걸어가라”고 외쳤다.


 


천명은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아는 것이다.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가 아니라,

선택한 길을 얼마나 잘 걸어갔는가에 따라 자신의 실존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도 《파우스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유령이 나오든 말든 자기의 길로 나아가라.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괴로움도 행복도 만날 테지.”


 진정 자신으로 실존하고 싶다면, 지금 내 앞에 놓인 길을 충실히 걸어가야 한다.

그 길이 바로 나만의 길이며,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세상에는 오로지 자신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가르친다.  


삶이 주는 고통, 비루함, 허무함

그리고 원망스러운 인간관계마저 긍정하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대개

 자신에게 다가오는 행운은 긍정하지만

불운은 부정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환경이며 운명이기 때문이다.


비록 가혹한 조건이라도 내 앞에 놓인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 또한 삶을 이루는 필연적인 조각이기 때문이다.


내 앞에 놓인 삶의 모든 조각을 긍정할 때,

 비로소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힘과 용기도 생긴다.


매미는 1주일을 울기 위해

17년을 땅속에서 비루하게 지낸다.


인간은 운명의 길에 서기 위해서 환골탈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니체는 단언한다.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변신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을 “조금 무모하고 조금 위험하게 다루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혼자서 가려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불안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내해야 할 인간의 실존 조건인 것을.


'네 운명을 사랑하라'가 결코 역경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라는 게 아니라,

운명을 자신의 몫으로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나아갈 길을 찾게 된다.


그래서 불완전하지만 가혹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하늘에 이르는 환호를 얻기 위해서는 죽음에 이르는 비애를 각오'하라며 한마디를 더 던진다.


 “너는 네 운명을 사랑하고 삶의 주인공이 될 너 자신이 돼야 한다.

사랑과 희망을 걸고 간청하노니 네 영혼 속에 있는 영웅들을 몰아내지 말라!”


사는 것은 고단하다.

내 영혼 속에 있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영웅을 찾는 일은 더 고단하다.


 하지만 산에 오르는 사람이

땀 흘리는 노력없이

어찌 산정(山頂)의 시원한 바람을 맛볼 것인가.


천명을 알기 위해,

 또 운명의 길을 찾기 위해 고생할 당신을 휘해

명상시인으로 불리우는 구상 선생의 '꽃자리'라는 시를 소개한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네가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나는 내가 지은 감옥에 갇혀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앗줄에 묶여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기쁨과 보람을 맛 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네가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니체는 운명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했는데

“초인이란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초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운명의 길을 찾아 그 길 위에 쓰러지더라도 그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논어>의 첫 문장은

‘배우고 익히면 때로 즐겁지 아니한가.’이다.


 누구나 다 알듯 배움을 의미하는 학(學)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인생의 시작이라면

 논어의 마지막 문장은 천명과 도리(禮), 말을 이야기 한다.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예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설 수 없으며   不知禮 無以立也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不知言 無以知人也


지명(知命)은 운명,

즉 천명을 알아야 군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천명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니,

 본성의 좋은 덕(德) 이것이 명이다.

생사, 화복, 영욕에도 명이 있다.

 명(命)을 알지 못하면 선을 즐길 수도, 자기 자리를 편안히 할 수도 없어,

자기 자리를 따라 행동하지 못하니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풀었다.


 하늘이 명하는 자신의 길은 저절로 알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성찰하여야 한다.

그래서 알게 되는 운명의 길을 사랑하라.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다.    


목표에 도달하고 말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택한 길 자체가 다른 사람이 이룬 어떠한 결과나 목표보다 훨씬 중요하다.


 인생의 의미와 행복은

하늘이 준 그 길을 가는 동안 얻는 것이다.


그 목적지를 가면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존재를 실감하고 그

 길이 당신의 간절한 열망과 열정에 부합할수록  

인생의 여정은 행복할 것이다.


‘이 길이 과연 나의 길인가?’


인생길을 가다보면 누구나 흔들린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이 ‘운명의 길’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다.

 바람이 불고 고난이 닥치면 더 흔들린다.

선인들은 마음이 흐려질 때는 고전을 보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역사를 보았다.


자신을 역사와 고전을 통해 성찰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이런 시를 남겼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에는           踏雪野中去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마라          不須胡亂行

오늘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은            今日我行蹟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느니       遂作後人程


이 시는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의 아들 결혼 때 ‘화해의 상징’으로 주어 더 알려졌다.


 하지만 그 후 검찰의 ‘전두환 불법자금 환수’ 때

압류되어 경매된 비운의 선물이 되었다.


당사자도 아닌 아들의 결혼선물을 압류하여

경매하는 것은 도리도 아니요 법을 세우는 것도 아니다.


가격도 큰 것이 아니고 법을 세우는 것도 아니라면

오히려 그 선물만큼은 그대로 두어

‘화해’라는 의미가 남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관용과 이해가 적다.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


한 선사의 말이다.


어찌 스님 뿐이랴.


인생은 모두 혼자 가는 길이다.

 자신의 길을 혼자 가는 것이다.

길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정말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하는가.” 물어야 한다.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좋은 때도 순간이고 나쁜 때도 순간이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을 지나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찾게 되면서 천명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몽테뉴는 이미 알았다.

나 자신을 잘 이해하는 것이 곧 남을 이해하는 것이요,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식이나 지혜는 이미 내 안에 다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네 자신이 되라(Be yourself)'는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 네 자신이 되라.

 네 자신이 아닌 다른 자신은

이미 누군가가 모두 차지했다(Be yourself; everyone else is already taken)."  


허니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거나 버리지 마라.

 당신의 인생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 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캐롤 버넷은 이렇게 말했다.

“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아무도 날 대신해 줄 수 없다. (Only I can change my life. No one can do it for me.)”


제행은 무상하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영원하지는 않다.


아무리 지키려 해도  만물은 변하고 사라진다.  

모든 것이 돌고 돌지만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노무현은 노무현의 길을, 박근혜는 박근혜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자신의 길을 담대히 가라.

  나의 인생은 나의 것이다.

 인생길의 주인공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바로 당신이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마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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