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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Oct 08. 2015

그들은 길을 찾아 왜 떠났을까

나는 내 운명---몽테뉴, 싯다르타, 효봉

에세이의 원조로 불리우는 몽테뉴의 <수상록 Essais>은 몽테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 쓴 책이다.


 몽테뉴는

“이 책은 세계에서 유일한 종류의 책이다”라며

“나 자신이 이 책의 주제다”라고 말했다.


몽테뉴는 '에세이'를 가리켜  이 책은 나 자신을  알기 위한 여러 시도의 결과물이고 평가했다.


그 시도를 통해 몽테뉴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게 곧 남을 이해하는 것이요,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를 이해할 지식과 지혜는 이미 내 안에 다 있다는 것이다. 몽테뉴의 말들에서 자신의 길인 ‘운명의 길’을 찾기 위해 도움이 되는 말을 현명한 당신에게 소개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스릴 수 없기에 나는 스스로를 다스린다.”

“나는 키케로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전문가가 되겠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나답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는 게 나의 일이요, 내 재능이다.”      


한 철학자는 역사를 바꾸거나 자신의 운명을 바꾼 인물들의 공통점으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과 이기심을 꼽았다. 자기에 대한 사랑이 자신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었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을 하려면 먼저 눈이 열려야 한다. 이른바 개안(開眼)이다.


산에 절을 처음 짓는 것을

산을 연다고 하여 ‘개산(開山)’이라고 한다.


여자가 비로소 여인이 되는 것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면서이다.

 이처럼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깨달음이 바로 개안인 것이다. 눈을 다시 뜬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다시 보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다.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못보고, 안 보기 때문에 불만이 생긴다.


그래서 세계의 지성으로 불리우는 헤르만 헤세는 “스승은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헤세 또한 어려서는 조숙했으나 반항아였고 아버지와의 갈등도 심했다. 심지어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까지 보냈다. “자살하려고 하니 권총살 돈을 보내주세요.” 13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15살에 자살까지 시도한  헤세의 어렸을 때의 방황과 고민이 만들어 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성장소설, <데미안>이다. 헤세는 스스로 해탈과 구원을 위한 운명의 길을 찾고자 각고의 노력을 했는데 그래서 나온 소설이 바로 <싯다르타>다. 불타의 생애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싯다르타는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태자 때의 이름이기도 하다.          

싯다르타는 ‘목표를 발견한 자’, ‘목표에 도달한 자’,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 자’라는 뜻이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그 목표를 발견하는 게 곧 목표를 달성하는 것,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나는 왜 사는가.’

 ‘내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인생의 존재의 의미와 같은 숭고한 목표 말고도 권력과 부, 명예같은 세속적인 목표도 많다. 오만가지 처세술과 전략으로 무장해 아등바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겨우겨우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헤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고, 기다리고, 단식하는 법을 알면 누구나 기적같은 마법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목적에 이를 수 있다.”

단식은 단식 그 자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기절제’, ‘겸손’을 의미한다. 우리 인생은 고난 속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헤세가 던지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우리 인생에서 버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혜와 구원과 해탈을 얻는 데 군더더기 경험은 없다.”


<싯다르타>는 1억권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코엘류가 1967년 20살 때 소년원에 갇혀있을 때 그에게 구원의 빛을 주었고 그 영감은 <연금술사>를 낳았다. <연금술사>나 <헤리포터>, <돈키호테> <대장금> 등도 내용은 비슷하다. 고난의 여정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찾거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이야기인 것이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롭게 해석될 뿐이다.

부처는 인생의 길을 묻는 코사라국의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인간이 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인간들,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인간들,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인간들,

빛에서 빛으로 가는 인간들이 그것이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인간들은 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한 생활을  하고 나쁜 행동, 더러운 말, 나쁜 마음을 품은 인간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들은 천한 집안에 태어나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좋은 일, 좋은 말, 좋은 마음을 갖는 인간들이다.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인간들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몸, 입, 마음으로 나쁜 일을 하는 인간들이다. 빛에서 빛으로 가는 인간들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몸, 입, 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는 인간들이다.”

부처는 그 업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대문호 괴테가 죽으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나에게 좀 더 빛을…….”이었다.


가야할 인생의 길은 끝이 없다.

 그래서 <장자>에도 나온다.

 “인간의 삶은 끝이 있으나 앎의 세계는 끝이 없다.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스스로 ‘인간 국보’라 하던

양주동 선생의 호, 무애(无涯)도 여기서 나왔다.

 

인생길은

주어진 계단을 하나하나 넘어설 때마다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춘원은 인생을 등산에 비유했다.


“인생을 무엇에 비기리.

 산오름에 비기리라. 오르면 새 경개요.

 넘으면 새 경개라.

험한 턱 추어 오르면 더욱 큰 경개로다.

마루턱 다 올라설 때 오른 고생 혜오랴.”  


정상에서 보면 산 오를 때의 고생은 어느덧 옛말이 된다. 산기슭에서 허덕일 때는 정상이 아무리 먼 것 같아도 결국은 오르게 된다.  산 꼭대기까지 오르면서 경개마다 펼쳐지는 경치와 느낌을 맛보게 된다. 노력한 자만이 얻는 기쁨이요 환희다.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통쾌한 시원함을 결코 맛보지 못한다. 성공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으며 중단하는 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은 일제 시대 조선인 최초로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평양에서 판사가 되었다. 판사생활 10년을 할 때쯤 조선인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그 처지를 자책하여 사표를 던지고 엿장수로 떠돌다 37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


그의 제자가 법정 스님과 일초(시인 고은)스님이다. 뒤늦게 자신의 천명을 깨달은 것이다. 효봉 스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준 ‘열반송’이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吾說一切法  都是早騈拇

若問今日事  月印於千江


스승인 효봉 큰스님에게 큰 배움을 얻은 탓일까.

법정스님도 세상을 떠나면서

세상에  말빚, 글빚을 더는 남기지 않겠다고 하며

그 유명한 ‘무소유’ 등 저서의 출판을 모두 금지시켰다.  


천명을 알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래서 숙명과 운명은 다르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기에.

현명한 당신은 어둠보다는 빛을 택할 것임을 나는 믿는다.


인생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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