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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Jan 06. 2016

집념과 복수, 운명을 새로 만들다 1

자신의 죽음까지도 책략으로 써 적을 몰살시키다

집념과 복수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일이다.

집념은  한 방향으로 자신의 정신과 힘을 모아 인생을 던지는  것이며, 복수는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분노의  덩어리를 표출하는 것이다.

 

 

니체는 복수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의 복수가 일으키는 폭풍우에 세계가 온통 휘말리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에게는 정의다."


복수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다. 내 운명은 내가 선택하리라. 집념과 복수는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말에서 자기가 속한 것이나 자기가 사랑하는 소중한 것들은 '우리'라고 표현한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나라 …심지어 아내도 '우리 마누라'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 것이라고 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땅'이다. 땅만큼은 내 땅이라고 하지 결코 우리 땅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있어서 땅, 즉 토지에 대한 애착은 뿌리가 깊고 절대적이다. 그것은 농경문화의 유산이다.


가축들에게 먹일 풀을 따라 이리저리 계속 이동하여 땅에 대한 애착이 적은 유목민족과는 달리, 정해진 자리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기에  땅은 생존과 번영,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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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부모를 죽인 원수도 세월로 잊을 수는 있지만, 아내와 땅을 빼앗아간 원수는 죽기 전까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서양도 자신의 여자와 땅에 대한 애착은 이처럼 강하다.


자신에게서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을 때, 혹은 심한 모욕을 받았을 때 사람은 복수를 꿈꾼다.


'내가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준다'는 복수는 인간의 오래된 관습법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나온다.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출애굽기 21:24 )


그러나 모두가 사적인 복수를 향해 나선다면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질서는 깨지고 만다.

그래서 생긴 게 법이다. 법은 진정한 정의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 함께 사는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도덕일 뿐이다.

 

니체는 복수를 정의라 한 반면, 링컨은 복수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이렇게 간파했다.


"개를 죽인다고 물린 자리가 낫지는 않는다."

 

복수와 원한에 대해서는 중국 춘추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의 관계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두 나라가 얼마나 적대적이었는가 하면 오죽하면 원수가 한배를 탔다는 뜻의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까지 생겼을까.


오왕 합려가 보검을 시험하기 위해 내리쳐 돌이갈라졌다는 '시검석'



오나라 왕 합려와 월나라 왕 구천의 싸움은 빈번했다. 오나라 왕 합려가 월나라를 침범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아들 부차(夫差)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밖에서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 원한을 잊을까 봐 신하를 시켜 “부차야! 너는 월나라 놈들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고 고함을 치게 하여 자신을 항상 복수심에 불타게 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은 지 2년, 마침내 부차는 월나라를 쳐부수게 되었다.


오나라 왕 구천은 패하여 회계산에서 영토를 넘겨주고 “나는 당신을 왕으로 섬기겠소.”하며 생명을 애걸했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려 했으나, 월나라 왕의 뇌물을 받은 한 대신의 꾐에 넘어가 그를 포로로 끌고 가 시종처럼 부려먹다가 함께 간 월나라 왕의 참모 범려의 책략에 말려 결국 그를 방면한다.


목숨만 살아서 귀국한 월왕 구천은 부차가 원수를 갚기 위해 장작더미에 누워 자며 쓰라림을 참았다는 부차의 복수를 거울삼아 자신은 쓰디쓴 곰쓸개를 핥으며, “너는 회계산의 수모를 잊었는가?” 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복수를 위해 다시 칼을 닦고 말을 기른 지 20년,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켜 그의 오래된 복수의 염원은 실현되었다.  


복수를 갚기 위해 장작에 누워 잔 부차와 곰쓸개를 핥은 구천-

 “원수를 갚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괴로움도 참고 견딘다”는 뜻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손자병법>과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는 <오자병법>을 지은 오기(吳起)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다. 풍운아였던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드라마틱하다. 그는 젊었을 때 집안의 재산만 믿고 여기저기 벼슬을 구하다 가산을 탕진했다.


게다가 자신을 비웃는 자들을 30명이나 살해하고 다른 나라로 도망치면서 어머니에게 “재상이 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팔을 깨물어 맹세했다.


노나라로 간 오기는 공자의 제자이자 효성으로 명성이 높은 증자에게 학문을 배웠으나, 증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자 사람이 너무 박정하다며 오기와 사제지간의  관계를 끊었다.


오기가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와 했던 맹세도 있고, 살인자로 수배까지 받았는데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을 증자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용병술을 좋아하던 오기는 문(文)을 버리고 무예를 닦았다. 때마침 강국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했다. 노나라 왕은 오기를 장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출신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오기의 중용에 대해 주저했다.


 “오기의 아내는 제나라 출신이오. 무릇 사람이란  부부간의 애정이 으뜸인데 오기가 과연 아내의 친정 나라를 맞이해 힘껏 싸워줄지 모르겠소.”


 이 얘기를 전해 들은 오기가 곧 집으로 와 아내 전씨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아내가 소중하다는 이유를 아시오? 아내가 소중한 이유는 가정을 이루어주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높은 지위에 올라 1만 석의 국록을 받고 적군과 싸워 대공을 세우고, 이름을 천추만세에 남긴다면 이 또한 집안을 크게 일으키게 되는 것이오. 부인은 내가 그리되기를 바라지 않소?”


그러자 오기의 아내가 말을 한다.


“남편이 그리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마음을 알았소, 그럼 됐소!"


오기는 한마디 말을  더  한다.


“지금 제나라 군사가 이곳 노나라를 치고 있소. 노나라 군주는 나에게 대장을 시킬 생각이지만 내가 제나라 전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는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소.”


그러고는 이내 칼을 뽑아 아내의 목을 쳤다.

오기는 비단으로 아내의 머리를 싼 뒤,  바로 노목공을 찾아갔다.


“신은 나라를 위해 싸우려는 일념뿐입니다.  여기 아내의 목을 가져왔습니다.”


 오기가 돌아가자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오기는 자기 아내보다 공명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장수로 삼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나라로 가버릴 것입니다.”


이에 노목공은 어쩔 수 없이 오기를 대장으로 삼았다. 오기가 대장이 되자 제나라 장수 상추와 대적하면서 우호를 맺을 듯 말듯 기만전술을 편 후 기습으로 적을 물리쳐 노목공으로부터 상경 벼슬을 받는다.


이 일로 오기는 출세를 위해 아내를 죽였다는 ‘살처구장(殺妻求將)’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오기에게는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 하지 않고, 자신의 아내를 죽이면서까지 장수가 되고자 했던 각박한 자”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노나라 왕이 나라를 구한 오기를 계속 중용하려 하자, 왕의  측근들이 오기의  과거 행적을 들며 그를 비난했다. 제나라 여자가 부인임을 내세워 오기의 중용을 막던 자들이  이제는 아내를 죽인 비정을 문제 삼는 것이었다. 능력있는 자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오기는 다시 노나라를 떠나 초강대국 위나라로 가 위나라 왕에게 중용된다. 그는 장군의 신분으로 병사들과 침식을 같이했고 행군할 때도 자기 짐을 직접 졌으며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걸었다. 부상당한 병사의 종기를 직접 입으로 빨아 상처를 치료하니 전쟁 때 부하들이 오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의 신임을 받은 오기는 위나라의 변방을 20년이나 굳게 지켰다. 오기는 위나라에 있는 27년 동안 주변국들과 76번의 전투를 치러 64번을 승리하고 12번은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진기록을 남겨 전쟁에 언제나 이기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위나라의 다음 왕이 즉위하자 선왕과는 달리 오기에 대한 새 왕의 신임이 약해져 오기는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소왕은 그를 재상으로 임명했고 오기는 위나라에 머무는 동안 개혁정치의 장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여러 조치를 통해 초나라를 단숨에 강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초나라 도왕이 죽자,  오기의 개혁정치로 그동안 오기를 미워하던 귀족세력이 그를 암살하려 했다.  오기를 죽이려는 숨겨둔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오기는 도망을 칠 곳이 없자, 죽은 도왕의 시신 위에 엎드려 정적들이 날린 화살을 맞고 죽었다.


오기는 물론 도왕의 시신에도 무수히 화살이 꽂혔다. 임금의 편전에는 칼도 차고 들어갈 수 없는데 왕에게 화살을 날린 자들이 무사할 수 있겠는가.


새로 즉위한 숙왕은 아버지의 시신에 화살을 쏜 자들을 잡아들이게 했고, 이 일에는 무려 70여 가문이 연루되어 일족이 모조리 처형을 당한다.


오기는 죽어가면서도 정적들에게 복수를 한 것이다. 그래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란 뜻의  ‘오기(傲氣)’를 오기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오기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시기심이 강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럽고 여색을 밝힌다는 부정적인 내용과 청렴하고 공정하며, 절조가 있고 명예를 중시한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대조를 이룬다.




적벽대전의 한 장면


오기는 전국시대 4개국을 흔들고 병법서를 남길 정도로 유능한 장군이며 국가개혁까지 이룬 능력 있는 리더였다. 하지만 출세를 위해 아내를 죽인 비정함과 죽는 순간까지 자기를 모함하고 죽이려는 정적을 죽음까지 책략으로 써서 모두 제거시킨 무서운 책략가이자 풍운아였다.


오기에 대해 그의 마부는 이렇게 말했다.

"장군은 천하와 영화를 마치 헌신짝  버리듯 하시는군요."  


일에 대하여는 공평무사함과 헌신적인 동료애, 치밀한 책략을 발휘했으나, 출세를 위해 아내를 죽였다는 인륜 거역의 '잔인함'이  아직도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풍운아 오기는 자기 방식대로 살다 갔다. 자신이 정해놓은 원칙을 철두철미 지키며 살았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능력은 주변의 질시를 받아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좋은 제왕을 만나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시원찮은 군주 밑에서는 버티지 못하거나 모함을 받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가졌어도 때를 만나지 못하거나 택목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능력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장수, 병법서를 지을 정도로 뛰어난 전략가, 부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장군, 오기-     아내를 죽였다는 흠 때문에, 제자를 키우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변호는 없다. 죽어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명량' 포스터


 12척의 배로 왜군의 3백 척의 배에 맞선 명량해전-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각오가 담긴 이 말을 기억할 것이다.

 

 "반드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必生則死

   반드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必死則生"


이 말은 원래 오기의 '오자병법'의 <치병(治兵)>편에 나오는 말이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기를 바라면 죽을 것이다.  必死則生  幸生則死"


명장 이순신이 읽었던 오자병법, 그래서 오자는 풍운한 인생과 함께  마음이 간다.  사람은 죽어도 책은 남는다. 마키아벨리가 중용되지 못했지만 <군자론>으로 다시 평가받듯이 , 그 또한   <오자병법>을 남겼기에  그의 삶은 언젠가 새롭게 다시 해석될 것이다.  


능력을 지녀도 그것을 다스리는 힘이 없으면 주변을 이렇게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능력은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스리는 힘과 주변과 더불어 사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하늘이 준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교만이 아니면  주변의 질시와 시기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태산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평생을 통해 노력해 왔던 것이 이런 사소한 것에 무너지는,   어처구니없는 것이 운명이자 인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큰 것도 중요하지만 디테일도 중요한 것이다. "크게 보고 작은 것은 자세히 살피라"는 대관소찰(大觀小察)이라는 말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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