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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Jan 17. 2016

집념과 복수, 운명을 새로 만들다 2

예양...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士爲知己者死

사람은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가장 소중한 목숨을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것, 신념과 대의를 위해 초개처럼 던질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의인(義人)이나 협객(俠客)으로 부른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자객열전’을 따로 두어 다섯 명의 자객인 조말(曹沫), 전제(專諸), 예양(豫讓), 섭정(聶政), 형가(荊軻)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이것은 자객, 예양의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살았다.

그래서 예양의 말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목숨을 건,  ‘진실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김환기 화백 유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춘추시대의 진나라는 여섯 가문이 나라를 다스렸다.


예양(豫讓)이 처음에 범씨(范氏)와 중행(中行氏)씨를 섬겼지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후 예양은 지백(智伯)에게 몸을 의탁한다.


지백은 예양을 매우 존경하고 남다르게 아꼈다.


지백이 진양성 전투에서 조양자를 치자, 조양자는 한씨, 위씨와 함께 일을 도모하여 지백을 멸망시키고, 지백의 후손까지 죽여 그가 다스리던 땅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조양자는 지백에 대해 그동안 원한이 깊었다.

그래서 죽은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썼다.( 漆其頭以爲飮器)  일부의 책에서는 이야기를 극적으로 하기 위해 술잔이 아니라 요강으로 썼다고 하나,  <열국지> 이외에는 그런 기록이 없고 <사기>에는 옻칠을 해 ‘마시는 그릇’으로 썼다고 나오기에 술잔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고 본다.


 조양자가 이런 처사를 한 것은 태자 시절 지백에게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백이 정나라를 공격했을 때 당시 태자였던 무휼이 지백의 정나라 공격을 도왔는데,  이때 진중에서 지백이 술에 취해서 무휼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폭행한 적이 있었다.


가신들이 지백을 죽이자고 청하자, 무휼은 "주군이 나를 태자로 삼은 것은 내가 치욕을 참을 수 있었기 때문이오"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지백에게 앙심을 품었고 이 태도를 알아챈 지백이 진나라로 돌아와서는 무휼의 아버지인 조간자에게 무휼을 후계 자리에서 폐위하라고 요청한다.


물론 조간자는 이를 듣지 않았지만 이 일이 결정타가 되어 무휼이 지백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이다.


또한 지백이 조양자의 근거지 진양(晋陽) 땅을 포위하고 3년 동안 수공을 펼쳤는데, 결국 성안에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사람들이 자식을 교환해 잡아먹었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까지 몰렸다.

이런 과거의 악연이 쌓여 조양자는 지백에 대하여 그야말로 골수까지 원한이 맺혔던 것이다.


지백이 패하자 예양은 산속으로 도망쳐 지백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조양자가 이미 지백과 후손까지 모두 죽인 후 자신의 주군인 지백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양은 분노에 차 복수를 다짐한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지백은 진실로 나를 알아주었으니  나는 반드시 지백을 위해 복수를 하리라. 그리고 죽어 지백을 보면 내 영혼조차 부끄럽지 않으리라”


그 후 예양은 이름을 바꾸고 조양자 저택의 미장이로 들어가 변소의 벽을 칠하며 그를 죽일 기회를 엿보았으나, 실패하여 잡혀 심문을 당한다.


“너는 왜 나를 죽이려 하는가.”  


조양자의 물어보자 예양은


“주군 지백의 복수를 위해서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이 말에 분개한 조양자 측근들이 예양을 죽이려 하자, 배포가 있는 조양자는 이렇게 말하며 풀어준다.


“예양은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조심하면 되는 일이니 죽일 것까지 없다. 지백이 이미 죽고 그의 후계자도 없는데, 신하가 죽은 주인에게 보답하려 한다. 이 사람이야말로 천하의 현인이 아니겠는가.”


조양자도 큰 그릇이었다.  


복수를 한들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일을 하는, 자기를 죽이려는  예양을 오히려 가상히 여긴 것이다.


사람은 가도 그의 정신은 남는다. '예양'의 동상


예양은 옻칠을 하고 눈썹과 수염을 민 후, 자기 손으로 몸에 상처를 내 용모까지 바꾸었다.

아내가 목소리로 예양을 알아보자, 아예 숯 덩어리를  삼켜 목소리까지 바꾸었다.


예양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는 지 알려고 시장을 다니다 우연히 그를 알아본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울면서 몸에 그릇에나 바르는 옻까지 칠하고 수염과 눈썹을 밀며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가 복수 때문인 걸 알자 이렇게 말한다.


“만일 복수를 꿈꾼다면 신체까지 훼손하면서 하는 이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당신의 재주면 능히 조양자의 총애를 받으며 심복이 될 수 있으니, 가까이에 있다가 신임을 받을 때 복수를 하는 게 더 쉬운 길인데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방법을 고집하느냐? “


그러자 예양은 단호하게 말한다.


“이미 신하가 되었으면서 또 그를 죽이고자 하면 이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내가 이처럼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장차 후세에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


예양은 조양자가 외출하려는 정보를 듣고, 다리 밑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예양은 살기를 느낀 조양자가 탄 말이 놀라 울부짖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잡힌다.


그러자 조양자는 잡힌 예양을 보고 꾸짖는다.


“그대가 예전에 섬긴 범씨와 중행씨를 지백이 멸망시켰다. 하지만 그대는 옛 주인을 위해서 복수하지 않고 신하의 예를 행했으며, 지백을 도왔다.  이제 이미 지백은 죽었고, 그 후사도 없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고집스럽게 나에게 복수를 하려 하는가?”


그러자 예양은 이렇게 말한다.


“범씨와 중행씨는 나를 중책에 기용하지 않았기에 나도 그에 걸맞게  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 나라 최고의 선비)로 대접했으니 나도 국사의 입장에서 보은 하려는 것이다.”


예양의 말에 조양자는 그의 의기에 감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아, 예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한 일은 이제 세상이 모두 알게 되었다. 내가 그대를 용서한 것도 이미 한 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더 이상은 풀어줄 수 없으니 그대는 죽음을 각오하라.”


조양자는 자기를 죽이려는 자객에게 성인에게나 붙이는 최고의 경칭인 자를 붙여 예자(豫子)라 불렀다. 그의 의로움과 충성은 알지만  더 이상은 그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양은 이렇게 말한다.


“어진 임금은 남의 아름다운 일은 숨기지 않고, 충신은 이름을 위해 죽을 의로움이 있다고 합니다.


전에 저를 관대하게 풀어주셨기에 천하에 당신의 현명함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늘의 일로 저는 당연히 죽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원컨대 당신의 의복이라도 얻어서 그 의복을  베어 복수의 뜻을 이루게 해준다면 죽어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감히 바라는 내 속마음입니다.”


예양의 의기에 감동한 조양자는 겉옷을 벗어준다.


예양은 검으로 조양자의 그 옷을 세 번 베면서,

“나는 이것으로 지백에게 보답했다”고 소리친 후 스스로 자기 목을 찔렀다.


예양이 죽던 날, 조나라의 지사들은 모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예양은 갔어도,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삼키는 것, 복수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제 몸을 괴롭힌다는 ‘칠신탄탄(漆身呑炭)’이라는 말은 아름답게 남았다.


사마천이 <사기>에 자객열전을 두어 예양처럼 제후도, 큰 선비도 아닌 복수를 실행하는 자객을 각별히 다룬 것은, 이들의 복수가 개인의 원한이 아니라 약자로서 정의를 실천하려는 의협심을 실천한 행동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알려지는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고 평가한 것이다.


김환기 화백의  유화


자기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던져서 보답하는 것- 그것이 선비다.


선비도 적고,

선비정신도 적은 시대이기에

그래서 우리는 오늘 곧은 마음과 의로움을 지닌 선비를 더  그리워하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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