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30대의 불안품기술
웬일로 피곤하지 않은 귀한 오전.
이 기분 좋은 하루에
팡파레같은 전화 한 통이 울렸다.
“축하합니다, 저번 주 본 면접에 합격하셨어요.”
오? 나? 진짜???
꽤 규모 있는 암호화폐 차트 분석 회사.
번쩍 번쩍한 회사, 양복, 머릿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뚱한 대표 얼굴을 보며
속으론 ‘에잇 나가리네’ 읊조리며
즐겁게 면접을 봤더랬다.
이제 막 나스닥, 코인으로
돈을 잃은 아픔까지 들먹이며 유쾌하게.
사실은 슬프게^^
기대도 안 했고, 계획에도 없었다.
함께 면접장에 들어온 분홍색 스웨트에 세상 아름다운 인사담당자 그녀가 팡파레 같은 축하 멘트를 날리기 전까진.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처우,
상냥한 인사담당자,
그리고 마침 기분 좋은 오전.
팡파레처럼 울려 퍼지는 전화 한 통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팡파레 같이 찬란한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폭죽이 꺼지고 현실로 돌아온 순간
어라...
지금까지 거쳐간 숱한 회사들에서의
내 모습이 어땠던가.....
‘... 내가 이 회사에서 3개월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ㅋ
나는 늘 그랬다.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사,
내 감정을 담은 간곡한 글,
그리고 그 글에 감동해주는 당신들이 없으면
채 석 달도 못 버티고
어느 회사든 도망치듯 나와버리길 7년째.
이번엔 다를까?
암호화폐 차트를 분석하고,
기계처럼 글을 써내야 하는 매일.
주 5일, 하루 8시간.
그 안에 나의 언어와 감정을 담을 자리가 있을까.
그 글로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합격 소식에 으쓱했던 어깨는,
어느새 이름 모를 불안으로 스며들었다.
기분 좋던 마음은 금세
익숙한 불안의 그림자에 잠식됐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 불안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불안은 늘 내 곁에 있었다.
그저 종류가 계속 바뀌었을 뿐.
입사 전엔
‘왜 나는 안정적인 그릇에 담겨있지 못할까’라는
불안이란 놈이 곁에 있었고,
합격 소식을 듣자
‘또 금방 그 그릇에서 탈출하고 싶어지면 어쩌지’라는
얼굴 바꾼 불안한 놈이 찾아왔다.
그래 맞아.
오늘, 이 팡파레가 울리기 전에도
사실 나는 불안했다.
좋은 날씨 아래,
안정적인 회사에 담기지 못한 나 자신이.
그런데 그 전화 한 통 이후 또 다른 불안을 마주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까 봐,
이번에도 금세 회사에 실망할까 봐.
알고 있다.
이번 그릇도 나에게 맞는 그릇은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작년까지는
아무 그릇에도 담기지 않은 내 자신이 더 불안했다.
그래서 언제나
나를 들어 올려준 팡파레 같은 합격 소식에
곧바로 나를 태워,
기꺼이 그 숱한 회사들에 올라탔다.
에이, 그래도 이젠 졸업해야지.
늘 이런 식으로 그릇만 옮겨 타면,
내 그릇은 언제쯤 제 부피를 키울 수 있을쏘냐...
언제쯤 나를 오롯이 담을 수 있을쏘냐...
그릇 옮겨타기 경력만 7년째
이제는 내 발로 서있을 때가 됐다.
그렇게, 생전 처음
입사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은 것.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나 많은 회사를 옮겨다닌 이유,
그 와중에도 오래 머물렀던 회사들의 공통점.
머물렀던 곳. 그곳은 작았지만,
개인에 대한 ‘존중’이 있었고,
내 ‘존재’와 ‘서사’가 존중받았다.
나는 그 속에서 나사를 조이는 역할을 했다.
반면 다른 곳은,
규모는 컸지만 개인은 그저 부품에 불과했고,
서사는 없었으며
단기 미션이 목적을 대신했다.
그래,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존중’과 ‘서사’가 있는 공간을 원했다.
목적 있는 그릇을, 인생을 원했던 것이다.
아니 근데
이걸 왜 회사 돈을 받으며 한담?
회사가 봉사단체도 아니고.
간혹
존중과 서사가 있는 곳이 잘 얻어걸렸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회사는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에
적합한 부품들을 취급하고 잘 돌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회사를 나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회사에 맞아야 한다.
그래?
그렇다면
엄한 강물에 뛰어들어 도라지 찾고 있으면 안 되지.
이번엔 좀 다른 불안을 껴안아 보자.
그 불안을 껴안고 기꺼이 산에 올라 내 도라지를 캐자.
산을 그릇으로 삼고 열심히 빗어서, 빗어서
깨지면? 더 안 빗어지면?
그때 다른 그릇 찾지 뭐.
자, 이제
불안한 그릇 위에 나를 빗어볼까? 이 젊은 백수야.
[덧붙임]
오늘도 발행할 글감을 주신
굴지의 코인 회사,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