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건 분명한데, 살고 있다는 감각이 사라질 때

— 하이데거, 그리고 나의 매일 아침

by 삼계탕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은 평소엔 잘 안 떠오른다.

그냥 주어진 하루를 살고,

일하고, 피곤하면 쉬고,

그게 반복되니까.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별안간,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툭 튀어나온다.


그 순간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 질문에 당장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비본래성(inauthenticity)’이라고 불렀다.


말은 어렵지만,

사실 이 개념은

우리의 일상 깊숙한 곳에 있다.


비본래성이란 이런 거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냥 그렇게 사는 상태.

왜 사는지 묻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만 고민하는 상태.



하이데거는 말한다.

인간은 대부분 비본래적으로 산다.


왜냐하면,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건

책임이 따르고, 불안도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도 다 그렇잖아.”

“지금은 바쁠 때니까.”

“아직 때가 아니야.”

같은 말들 속으로 숨는다.


그 말들은

마치 ‘괜찮은 핑계의 옷’을 입은 회피다.



그리고 우리는

그 회피를 너무 오래 해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누구였는지도,

무엇을 원했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사는 건 맞는데,

살고 있다는 감각은 없다.



하이데거는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진짜 나의 삶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시작된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이 유한하다는 감각’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오늘 하루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말하는 ‘바쁘다’, ‘피곤하다’는

진짜 이유일까?

아니면 내가 만든 유리병일까?


지금 이 선택이

정말 내가 원한 방향이 맞을까?


이 질문들 앞에

도망치지 않고 멈춰 선 순간,

우리는 다시 본래성의 자리로 돌아온다.



여전히 자주 도망친다.

그런데 도망친 나를 알아차릴 수 있을 때,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그게 하이데거가 말한 ‘자각’이고,

그 자각이

다시 행동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만들었다.


계단을 오르며 그걸 느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걸음이야.”

그게 정말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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