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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즈니스 캐주얼 Feb 25. 2021

깊이에의 강요

평가하는 사람의 폭력, 평가받는 사람이 만드는 가치

최근에 읽은 '깊이에의 강요'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소감을 남겨놓고자 하여 기록합니다.


- 제목: 깊이에의 강요

-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 출판: 열린 책들

- 산곳: 여의도 IFC 영풍문고

- 가격: 12,800원

 - 구입한 일시: 2021년 2월 19일 18:20


처음에는 문학 작품인지 모르고 '깊이에의 강요'라는 제목만 보고서 '깊이'라는 말의 부당함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고 반박하는 글인 줄 알았습니다. 저도 '깊이'라는 단어에 평소에 좀 반감을 갖고 있는 편이었기에, 제목부터 많은 공감을 느껴서 구매하게 됐습니다.


'깊이'라는 말 자체는 매우 주관적이고, 정량화할 수 없으며,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거만하고 게으르게 피평가자를 혹평으로 괴롭힐 수 있는 아주 모호한 단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직접 사서 읽어보니 문학 장르였습니다. 네 편의 단편들을 묶어놓은 모음집입니다. 책도 굉장히 얇고 작습니다. 총 83페이지입니다. 얇고 작은 책 치고는 12,800원이라는 가격이 좀 비싸게 느껴집니다만, 요즘 전체적으로 책 가격이 올라서 그냥 별 생각 안 하고 샀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이 되어있습니다.

1. 깊이에의 강요 7

2. 승부 15

3. 장인 뮈사르의 유언 37

4. 문학의 건망증 65

옮긴이의 말 79



첫 번째 이야기는 한 예술가의 안타까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도유망한 젊은 예술가가 있었는데요. 그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평가를 듣고 괴로워하다가 비참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작가가 죽고 나자 평론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안타깝다는 듯이 그 예술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녀의 작품이 그녀의 깊이에의 강요에 대해 반항하고 있다는 평을 남기는데, 개인적으로는 문체가 매우 난해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네요.


읽으면서 저는 이 평론가가 매우 잔인하고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뱉은 한 마디가 한 때 전도유망했던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거든요. 요즘의 인터넷 악플 문화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좀 더 가치를 만드는 사람들은 '평가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용기를 내고 자신과 자신의 작업물을 세상에 드러내는 '평가받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언제나 응원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늙은 체스 고수인 '장'과 그에게 도전한 젊은이의 체스 승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의 구경꾼들은 평소에 '장'에게 많이 패배해왔었고, 지루하고 끈질기고 보수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장'의 스타일에 굉장히 불만이 많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하수였던 젊은이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의 바보 같은 수들을 보고서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기대를 하고 응원을 보냅니다. 관중들을 마지막까지 불리한 상황으로 변해가지면 '마지막 결정적인 한 방으로 장을 이겨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러한 수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장'은 승리하고 젊은 도전자는 예의 없이 떠나버립니다. 그 경기에서 이긴 '장' 또한 사실 자신을 이겨주길 바랬었고, 젊은이를 고수라고 생각했던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하여 체스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관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짜 우상에 쉽게 현혹되는 대중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모습에 취해서 실질을 제대로 보지 못 하고 허세와 허풍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은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보석 공예 장인이었던 뮈사르라는 사람의 생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내내 뮈사르가 자신의 생각과 주장에 대해 일기처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조개화'가 된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고, 그 비밀을 자신이 알아낸 것 때문에 자신도 '조개화'가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그것이 실현되어 죽게 됩니다.


그가 죽고 나서 하녀의 제삼자의 시점에서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바라봄으로써 그의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사회로부터 자신을 격리해서 자기만의 생각에 사로잡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기도 합니다.


네 번째, 마지막 이야기는, '문학의 건망증'이라는 제목입니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간단합니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괴테의 작품, 도스토예브스키, 셰익스피어 등 많은 고전을 공부하고 읽었지만, 그것들 중에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읽었는지 제목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남은 단 한 가지 메시지는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금세 까먹는 저로서는 많이 공감 가는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부 무용론에 빠지기도 하고, 지치고 허무한 마음에 좌절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사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 (71p)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특히나 공감이 더 많이 갔습니다.


꼭 문학이라서 망각하게 되는 걸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무수한 정보들을 만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의 정보는 잊어버립니다. 학교에서도 교수님이 강의한 내용보다 이야기나 유머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리 포터의 작가인 조앤 케이 롤링도 하버드 졸업 연사 당시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드라이한 데이터나 정보보다 이야기 (내러티브)가 오래 남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할 때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것보다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상대에게 더 공감을 받아낼 수 있고 더 효과적인 방식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비문학만 좋아하고 문학은 무용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데이터와 정보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고 들으므로써 우리가 살 수 없는 타인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분량은 짧은 책이지만,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톤도 무척 강렬한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볍고 얇지만 내용만은 강렬하고 ‘깊은’ 단편을 읽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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