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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C Mar 02. 2017

나는 그냥 이해하고 싶다

   평화로운 휴일, 볕 좋은 오후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로 한복판이다. 4차선 도로의 소음을 뚫고 구시대의 선전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아 꽤나 신선한 장면이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멸공’과 ‘종북’이 적힌 하얀색 카니발 한 대가 느릿하게 지나고 있었다. 발원지다. 결의에 찬 목소리인데 어째 잘 들리지 않았다. 듣는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소음에 가까운 외침이다. 어쩌면 청자가 없는 공허함이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지하철 칸칸마다 “회개하라!!”며 복음의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신념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무관심은 볼륨을 높여야할 이유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이 달콤한 휴일에 ‘멸공’이 적힌 카니발을 이끌고 확성기를 통해 격앙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구국과 멸공을 외치는 어르신을 생각한다. 단순히 정성을 넘어 비장한 임무를 품은 선교사 같던 그들의 신념이란 무엇이며 사명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한 노인을 사회와 광장으로 나오게 하는가? 유난히 내겐 달콤했던 휴일이라 더욱 그것이 궁금해졌다. 이 정도의 달콤한 휴식을 버린 것은 물론이요 자비와 시간을 들여 시내를 휘젓고 다닐 만큼 강력한 것이라니 말이다.





그들의 플랜카드에는 메시지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요약되어있다. ‘탄핵반대’, ‘종북세력 OUT', ‘구국’, ‘애국’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대문짝만한 사진(..) 등 이다. 이 키워드를 나름대로 종합해보면 이렇다. ‘나라를 뒤엎으려는 종북세력의 공격으로 탄핵의 위기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을, 이 나라를 구해 내야한다.’ 이 영웅 서사 위에서 그들의 사명감과 신념을 읽을 수 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그들을 광장으로 이끌고 있다. 그들은 그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싶을 뿐이다. 아마 일제강점기, 독립투사의 심정인 것인가. 심정만은 그럴지도 모른다.


인식은 믿음에서 기인한다. 그들의 위와 같은 현실인식은 단연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강한 신념을 기반으로 한다. 그 신념이란 ‘박근혜 대통령은 삶을 희생할 정도로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부모도 잃고 자식도 없이 오직 국가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 오죽하면 박 대통령을 보고 국가와 결혼했다고 할까. (지금은 이혼소송이 진행 중 이지만..) 그래서 비선실세가 대기업들을 털고 서민들을 조롱했다 해도, 박 대통령과 그것이 뗄 수 없는 연결고리를 맺었다 해도, 그것은 오직 나라만을 생각했던 박 대통령과는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박대통령은 뒤통수 맞은 피해자일 뿐이다. 잘못이 있다면 그녀를 이용한 최순실에게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 어떤 사실보다 그들이 믿는 것은 박 대통령이다. 그래서 그들은 명백한 사실을 볼 수가 없다.


박 대통령에 대한 강한 신념의 기저에는 박정희가 있다. 꽤 유명한 사진 하나가 있는데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친필휘호와 함께 박정희가 손가락을 뻗어 뭔가를 가리키는 사진이다. 나조차도 순간적으로 이 사진과 카피가 뭉클할 때가 있었다. 그들에게 박정희란 일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여 나라를 일으켜 세웠지만 측근의 배신으로 인해 비명횡사한 극적인 인물이다. 그로 인해 전후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거쳐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달성하고 북한의 적대적 위협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이 영광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개인들의 삶은, 그 감정의 파고는 얼마나 거대한 것일까. 그들은 국가와 같이 성장했고, 지켜냈고 이뤄냈다. 나는 그 시대를 머리로만 이해할 뿐 가슴으로 느끼진 못한다.


어떤 극적인 경험을 한 사람에게는 겪었던 감정의 크기만큼의 신념이 형성된다. 이 신념은 이성으로 제어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신념체계에 따라 생각한다. 이성이 느슨하면 느슨할수록, 겪었던 감정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 신념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아마. 모순된 세계관이 충돌하는 줄도 모른 채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와 비교되지 않을 감정의 큰 파고 속에서 그들을 지탱하는 자존감은 폐허에서 우뚝 일어선 국가였겠다. 새마을운동이나 군대식 문화, 산업역군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월남 파견이라는 미디어의 선전들을 보면 국가와의 동일시는 그들에게 그러기 쉽고 그러고 싶었던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박정희는 곧 영광스런 국가의 상징이자 그 자체다. 박정희가 그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쳤다는 신념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문득 어느 날 그가 사기꾼이자 난봉꾼이며 사람들을 고문을 지시한 독재자라는 새 시대의 분위기라니. 인지부조화가 일어날 밖에.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아마 우리가 사실이라고 보는 많은 것들을 그들이 보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한다.




   

흔히 ‘콘크리트 지지층’, ‘틀딱충’, ‘1번 찍는 기계’, ‘가스통 할배’ 뭐 이런 단어들로 그들을 부른다. 이런 것들이 썩 달갑진 않다. 그들이 진심은 뭉개고 우리의 잣대로 그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조롱하는 것 같다. 그건 옳지 않다고 느낀다. 설사 답답하고 억눌린 삶에서 받은 어이없는 피해가 황당하여 나온 해악과 풍자일지라도 말이다.


그들의 현재는 어떤가? 한국사회는 노년의 삶을 방치해왔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해체된 가족의 경험을 겪은 최초의 노인들이다. 부양의 기대로부터 좌절되고 자식과 주변으로부터 소외되어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박탈감 속에서도 국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광장으로 나설 때의 그 심정은 사실 위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 진심을 모욕하거나 조롱하고 싶지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 어렵고 피해의식의 깊이는 깊기만 하다. 왜 우리가 그들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가하는 억울함이 우선적으로 표출된다. 2012년의 좌절에서부터 지하철 자리를 앗아가는 몰지각한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도움은커녕 우리의 일상을 힘들게만 한다. 그 와중에 “요즘 젊은 것들..”로 시작하는 흔한 멘트를 들으면 빡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각박한 미래에 1도 도움은커녕 훼방을 놓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해결은 결국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같이 가야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뻔 한 느낌에서 나온 뻔 한 대답을 던진다. 내가 가진 실마리는 ‘관계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공감 혹은 그 노력을 보임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무언가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제 그들이 인정받은 적이 있었던가? 그 한강의 기적은 사실 독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공과 실을 분리한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한 것이다. 그 둘의 경험은 연결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영광의 시대를 인정하고 기념하는 것은 마치 독재를 합리화 하는 것 같다. 많은 것들이 소통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날의 민주주의와 시대적 상황들은 그 자체만으로 그들의 노력과 경험을 부정하는 듯하다.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에서든 모든 곳에서 그들은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에 대한 이해는 그들 존재 그대로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해야하지 않나 싶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지만 말이다. 때론 그런 말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을 보기 마련이다. 그 신념체계가 무엇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것이 왜 이토록 강력하여 명백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지도 알기 어렵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다. 우리가 말하는 이해라고 해봤자 그저 이유를 유추하고 나의 비슷한 경험과 감정에 비추어보며 쫓아가다가 결국 어느 순간에는 아마 그런 것이리라 하며 뭉뚱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상대방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 내가 가진 어떤 강박 같은 것이다. 가래떡을 뽑아내 듯 길고 긴 글을 끊지 못하고 뽑아내는 이유다. 아무리 악하고 잔인하게 보이는 말과 행동일지라도 사실 그 사람이 악하고 잔인해서라기 보단 다른 진심을 가진 것일 뿐이라고, 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혹은 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이건 나의 강력한 신념이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이해해야 포용도 가능하니까. 한창을 조롱하고 욕하고 싸우고 갈등하더라도 종국에 가서는 이해하고 포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친구든 연인이든 부모든 회사든 사회든 세계든지 모두 다.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걸까 싶은데 왠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러고 싶고. 그게 맞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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