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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문 Feb 06. 2024

정기 검진과 냉장고 파먹기

건강 build up

정기 검진과 금식


'8시간 전부터 물을 포함하여 모든 음식 금식할 것.'

1년 전 받은 검사 예약서에 지시된 사항이다. 몇 년 전부터 일 년에 한 번씩 복부 초음파 검사와 혈액 검사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간경화로, 아빠는 간염에 패혈증으로 돌아가셨기에 내 나이 50이 지나면 간 건강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7년 전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 사실 복통이라고 하기엔 위치가 애매했다. 왼쪽 갈비뼈 아래쪽에 장기인지, 피부인지 뭔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눕지도 앉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늘 찾는 가정의원과 내과를 찾아가 약을 처방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당시 신경 쓰이는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잠도 못 자던 때였다. 근처 종합 병원 소화과를 찾아가 상담하고 입원하여 검사를 받기로 했다. 아마 소화기, 복부 쪽은 위 내시경, 대장 내시경, 초음파, 혈액검사 등 웬만한 검사는 모조리 했다. 또 3일 동안 핸드폰도 꺼놓고,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아 시간 나는 대로 자고, 죽으로 식사를 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시원했다. 통증의 특별한 이유는 찾지 못했고, 하나 발견한 것이 간에 있는 3cm 정도의 혈관종이었다. 또 혈액 검사에서 암표지자 수치가 높게 나와 이 두 가지를 지속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였다. 의사는 암표지자 수치가 계속 증가하면 위험하다고 하였다. 그 후 3개월, 6개월 간격으로 혈관종과 혈액검사를 하며 변화가 있는지 지켜보았다. 이후 나는 나대로 음식이나 식습관에 조금이라도 간에 무리가 갈 것 같은 것은 삼갔다. 그래서인지 혈관종의 크기도 조금 줄어들었고, 혈액 내 암표지자 수치도 증가하지 않고 조금 낮아졌다. 이후는 1년에 한 번씩 정례행사처럼 복부초음파 검사를 하고 있다. 작년 검사 때에는 물도 마시지 말라는 지시사항을 간과하고 물도 마시고, 음식도 조금 먹었더니 비싼 비용을 치르고도 제대로 된 검사 결과를 얻지 못했고, 또 진료 상담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작년에 받은 지시사항은 남편에게 잘 보관하도록 부탁해 놓았고, 덕분에 올해는 철저하게 금식 사항을 준수했다.


금식과 냉파(냉장고 파먹기)

소식한다고 생각한 건 생각뿐이었는지, 금식 8시간 하는데 평소 새벽에 먹던 식빵 한 조각, 차 한 잔, 물 한 잔의 결핍이 왜 이리 크게 다가오는지, 입안이 타들어가는 듯 어려웠다. 그런데 이런 비자발적 금식에 일종의 쾌감이 있다. 억지로라도 속을 비우는 쾌감이다. 가끔 간헐적 단식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마음뿐이다. 요즘이 딱 그랬다. 많이 먹지는 않는데, 끊임없이 뭔가 계속 먹고 있었다. 먹어야 할 게 냉장고에 쌓여 있는 것도 계속 먹게 하는데 한몫한다. 금식에 쾌감을 느끼는 나는 냉장고 파먹기도 금식만큼이나 좋아한다.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를 비우면 나의 장도 함께 비워지는 기분이고 사실 그렇다. 그런데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남편이 자꾸 과하게 음식을 쟁여놓는다. 한 주 먹을 것, 일주일 식단을 고려해 골고루 필요한 것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고 싶은 것만 과하게 산다. 자기가 요리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쟁여두는 음식이 여간 스트레스를 주는 게 아니다. 그럼 벌써 기분부터 체하는 듯하고 실제 몸도 그렇게 반응한다. 지금도 냉장고에 쌓인 음식을 생각하니 다시 체기가 온다.


2006년에서 2007년으로 넘어가는 때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이들과 세 달 살았었다. 스페인계 여자가 주인인 아파트였는데, 주로 필리핀 사람들이 살았고, 한국인과 외국인 몇 가정이 살았다. 필리피노들은 대개 접시에 밥을 담아 소금과 함께 손으로 찍어먹었다. (그러니 조미김을 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그들도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그들과 같이 크리스마스 잔치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지만, 우리처럼 매끼 밥과 반찬을 요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파트 복도에 큰 쓰레기통이 있는데, 거리에는 쥐도 많고 바퀴벌레도 많은데 쓰레기통에는 음식 쓰레기를 볼 수가 없었다. 뭔가 음식을 남겨서 마구 버리면 안 될 거 같았다. 게다가 주방의 냄비며 프라이팬이 거의 일인용처럼 작았다. 좀 더 큰 것으로 장만할 수도 있었으나, 이참에 나는 매끼 우리 식구 딱 먹을 만큼의 국과 요리를 하고, 최대한 음식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로 했다. 아파트에 갖추어진 냉장고 크기도 크지 않아 음식을 많이 쟁여놓고 먹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300미터 거리에 큰 마트가 있어서 매일 오후 하루치씩 장을 보았다. 게다가 그곳 마트에서는 작은 토마토 세 개를 사도 뭐라 하지 않고, 작은 주먹만 한 덩어리 고기도 한 덩어리만 사도 무게 재어 가격표를 붙여주고 조금 산다고 눈치 주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그날 먹을 분량만큼 사서 요리해서 먹으니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냉장고도 시원하고, 쓰레기도 나오지 않고, 건강이나, 환경이나 여러 면에서 좋았다. 한국에 와서도 그렇게 생활해야지 마음먹었는데, 문화적 환경이 전혀 달랐다. 냄비도 크고, 그릇도 크고, 냉장고도 크고, 마트나 장에서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후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필리핀에서의 적게 사고, 적게 요리하고, 수시로 냉장고를 비우던 삶을 떠올리며  냉장고 파먹기를 시도한다. 몸도 냉장고도 비우고나면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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