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전해주어야 할 책이 있었다. 우편으로 보내도 되지만 계제에 얼굴도 보고 싶었다. 늘 분당으로 갔지만 좀 색다른 곳에서 만나고 싶었다. 여러 번의 장소를 변경한 후 남산 한옥 마을에서 보기로 했다.
2021년 겨울 미국에서 날아올 합격 소식을 기다리다 지친 딸아이와 남산을 걷고 한옥마을로 내려왔었다. 국악당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시는데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마당 한가운데 초록색 트리와 빨갛고 노란 트리 장식이 하얀 눈 사이에서 반짝였었다.
그때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어제 남산한옥마을엔 봄맞이 나들이 나온 분들과 외국인들, 그리고 점심식사를 마친 근처 직장인들이 손에 아아를 들고 산책하느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너무나 뻔한 한옥마을 같지만 올 때마다 실망하지 않는다. 특히 남산 한옥 마을에 고택들은 고궁의 한옥들보다 더 잘 갖추어져있다. 벽지며, 각 방에 가구들, 잘 개어진 이불, 벽에 달린 그림들, 부엌의 가마솥과 아궁이, 물항아리, 찬장 등등 사람이 살고 있는 듯, 그리고 양반집에 어울리게 싼티 나지 않는 소품들로 신경쓴 것이 보인다. 마치 옛사람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듯 잘 갖추어져 있어 조선의 후손으로서 흐뭇했다.
입구 헛간에 세워진 지게가 아빠를 생각나게 하였다. 아빠와 함께 뒷산에 나무하러 갈 때, 아빠는 지게 지고 갈퀴 들고 올라가시고 나도 작은 갈퀴 들고 아빠를 따라갔었다. 솔고로(마른 솔잎)을 한 지게 짊어지고 볏단이나 실은 듯 흐뭇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고택의 잘 쓸어진 마당이 또 아빠를 떠올리게 했다. 잘 쓸어진 마당이 아빠를 떠올리는 것 보면 아빠는 마당 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거 같다. 어제 한옥마을 고택의 마당을 보니, 마당 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한옥에 정갈한 마당은 고아한 한옥 분위기에 중요한 부분임을 깨닫는다. 잔가지가 많이 붙어 있는 가는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기분이 좋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 혼자 마당을 쓸곤 했다. 그러면 기분이 내 마음도 깨끗해졌다. 우리 가옥에서 마당 쓰는 일은 아마 미국 사람들이 잔디 깎는 일과 비슷할까? 그보다 더 정갈한 느낌이지만 아마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거 같다. 국민학교 다닐 때, 주말 아침에 동네 학생들이 모여서 마을 쓸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어렸을 적, 그런 경험들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요즘 학부모들은 학생들에게 그런 일 시키면, 아이들에게 노동을 시키면 안 된다거나, 공부를 한 자나 더 시켜야 한다고 난리일지 모르겠지만, 내겐 마당 쓰는 경험이 그것들보다 결코 경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어제 남산 한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정갈하다'였다. 정한수 한 그릇을 어디에 놓아도 괜찮을 정도로. 앞마당은 물론이고 집을 돌아 담장 옆, 뒷마당, 장독대, 뒷마당 화단까지 어디나 정갈했다. 잘 쓸어진 마당이 한몫했다. 그런 마당 한편에 매화나무가 있고 달달한 매화향이 어디나 가득했다.
한옥의 묘미 중 하나는 '담장의 높이'이다. 안의 사람이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이 담장이 애간장을 녹인다. 적당히 소통하면서 적당히 거리를 존중하는 절묘한 높이이다. 둘을 박아 무늬를 낸 벽과, 기와가 얹어진 라인이 멋지다. 동양의 특징을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 의식이라 하는데, 그런 점은 한중일 삼국 중에서도 우리나라가 가장 으뜸이다. 우리의 옛집은 소박하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온전히 자연과 하나가 된다.
남산 한옥 마을의 옥의 티는 값싼 공산품으로 싼티나는 공예품 상점이다. 이건 남산한옥마을뿐만이 아니다. 우리 전통을 소개하는 관광지에 기념품은 재정비가 절실하다. 정말로 옛날 전통방식으로 만든 물건이 아니며, 우리 전통 기념품으로 내놓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전통 기념품 가게 옆을 지나치려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제발 이 부분은 관할 기관에서 꼭 신경써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