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공존 모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문 Nov 27. 2023

쌀 보리

김깜지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깜지를 엄마와 형제들로부터 데려온 날부터 깜지에게 고마우면서도 늘 미안했다. 고양이로서 외로울 수 있기에. 가끔 뒷산에서 지들끼리 뛰어노는 고양이들을 보면, 깜지도 친구들과 저렇게 맘껏 뛰어놀며 살았어야 하는데 하는 미안함이 든다.  아파트 실내에서 앞으로 평생 살아야 할 깜지가 안쓰럽다. 이 안에 나비나 쥐나 새소리나 뭔가 깜지의 호기심을 촉발시킬 재미난 것들의 없으니.


그래서 종종 깜지를 재밌고 신나게 해 줄 뭔가를 하려고 한다. 청소기를 돌리는 것도 깜지를 위해서다. 여기저기 깜지의 털을 청소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소기의 웨~엥 소리는 깜지를 긴장하게 하고, 적과 맞서는 본성을 드러내게도 한다. 그러면서 청소기를 따라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뭔가 굉장한 적군을 맞서 싸우는 장수처럼. 겁은 많아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면서.


또 이불을 턴다. 뭔가 커다란 게 풀썩이는 건 깜지를 흥미롭게 한다. 이불을 들썩이면 기회를 엿보다가 이불속으로 쏙 들어간다. 그것도 깜지에겐 놀이이다. 작업을 하려고 종이를 펼치지만 한편으론 깜지를 심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깜지가 찢어도 될, 종이를 준비해서 유혹한다. 둥근 하수도 관처럼 크게 말린 종이 사이에 들어가 숨는 것도 좋아한다.  


한동안 깜지랑 축구를 했다. 사실 깜지랑 했다기보다. 내가 혼자 공 차고 깜지는 그냥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구경한다. 아. 깜지는 숨바꼭질을 좋아한다. 숨바꼭질을 모를 어릴 때 내가 가르쳤다. 둘이 재밌게 놀다가 내가 냉장고 옆이나 방 문 뒤에 갑자기 숨는다. 그럼 내가 안 보인다고 깜지가 운다. 그때 내가 작은 소리를 내면 깜지가 내게 와 힐끗 쳐다본다. 항상 바짝 다가오는 법은 없다. 최소 30~50cm 정도  거리를 두고 와서는 조심히 나를 쳐다보고는 쏜살같이 도망간다. 그럼 내가 따라가고, 조금 놀다가 또 내가 숨는다. 그런데 요즘은 깜지가 숨고 자기 찾아보라고 소리를 낸다. 그럼 내가 가서 '깜지 여기 있구나' 하면 신나서 달려 나간다. 그리고는 또 숨고 찾으라고 소리 낸다.


깜지는 종이 못지않게 비닐봉지를 좋아한다. 비닐을 핥거나 물어뜯고 질겅질겅 씹는 것을 좋아한다. 또 비닐봉지 안에 깜지를 넣으면 펑퍼짐한 엉덩이와 등이 아래로 축 늘어지고 그 봉지를 그네 삼아 흔들어 주면 좋아한다. 비닐봉지 중에 투명하거나 반투명 비닐에 소리가 바스락 거리고, 약간의 형태감이 유지되는 비닐에는 그 속에 머리를 들이 박고는 나와 놀기를 좋아한다. 엉덩이 꼬리는 밖으로 다 나와 있는데 얼굴만 들이밀고는 숨었다고 생각하는지. 암튼 그런 상태에서 나와 쌀 보리를 한다. 내가 발로 쌀 하고 내밀면 깜지가 자기 앞발로 보리 하면서 내 발을 잡는다. 두 앞발로 내 발을 잡으려 할 때면 영락없는 쌀보리 놀이이다. 하얀 벙어리장갑을 낀 듯한 손(앞발)으로 내 발과 열심히 쌀 보리 쌀 쌀 보리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대회화 100인 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