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와도 서먹하고, 서로 경계하며 간 보는 시기여서 얘가 애교가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던 당시, 원장님의 말씀은 무슨 관상쟁이, 점쟁이의 예언 같이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깜지는 얼굴 생김새처럼 정말 애교스럽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귀찮거나 싫은 게 있으면 금방 태도 돌변이다. 깍쟁이다. 상체를 세우고 우아하게 앉아 있을 때는 마리 앙뜨와네뜨 왕비 같은데, 나랑 숨바꼭질할 때는 꼬리털이 곤두서면서 서너 배는 굵어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그때는 선머슴이 따로 없다. 그러다가도 작은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숨는다. 뭐랄까 'fragile'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감정선이 분명한 천생 여자이다.
어떤 고양이는 싱크대에 올라가 냄비도 아래로 떨어뜨린다는데, 깜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있었다. 그날도 붓 빠는 물통의 물을 먹고 싶어 책상으로 뛰어올랐다. 평소에는 아무리 복잡해도 빈자리에 가뿐하게 착지했는데, 그날은 쌓아놓은 물감 접시가 복잡했었는지 깜지의 발이 접시를 건드렸고, 그 소리에 지레 놀라 그만 접시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세 아이의 방문이 열렸다. 세 아이가 자기 방에서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깜지 괜찮아?"
세 아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엄마 괜찮아?' '엄마 무슨 일이에요?'가 아니고 '깜지 괜찮아?'였다. 엄마 물감 접시 떨어뜨리고 깜지가 엄마한테 혼날까 봐 뛰어나온 것이었다. 엄마 아빠 앞에선 등을 보이며 자기 방에 들어가 방문 꼭 닫아놓던 아이들이 깜지 걱정된다고 동시에 뛰쳐나오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깜지는 단절되고 폐쇄되었던 아이들의 방을 개방시켰다. 깜지는 언제라도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의 문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방문을 발로 긁는다. 깜지의 노크 방식이다. 그런 깜지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강심장은 아무도 없다. 안 열어주고는 못 배긴다. 깜지는 우리 집 어디든 free pass이다. 또 가족들 간에 서로 화나거나 서운하여 대화가 중단되었을 때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상대에게 할 얘기를 깜지에게 하는 것이다. '깜지야, 너네 아빠한테 앞으로는 엄마한테 잘하라고 해.' '깜지야 너네 아빠 왜 그런다니?' '깜지야 너네 오빠 밉지?' 뭐 이런 식이다. 그러다 보면 서로 기분을 풀고 화해하게 된다. 깜지는 특히 오빠를 개방시켰다.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던 아들이 깜지를 찾아 안방에도 들어 오고 누나 방에도 들어간다. 다른 때 같으면 자기 방에 들어왔다고 화를 낼 누나인데, 깜지 찾으러 왔다고 하면, 깜지 이쁜 짓 이야기 하고 함께 쓰담쓰담하느라 화낼 생각도 못한다. 그렇게 깜지가 있는 곳은 어디든 개방이고 어디든 화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