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풀을 뽑기 좋게 만들어진 연장
#2.
빠르게 뛸 수 없으니, 정말 천천히 나아갔다. 몇달간 조금씩 뛰는 시간보다 거리만 늘려왔기 때문에, 속도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부담감없이 천천히 동네 한바퀴를 뛰며 몇일 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뛰어보려고 마음을 먹고는 동네를 크게 한바퀴 도는 중이었다.
천천히 뛰다가 늘상 보던 길의 어느 포인트까지 다다르면, 마음의 안정감과 성공했다는 기분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오늘은 조금더 뛸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발을 계속 내딛었다.
5km은 넘겼고, 6km를 지나고 있었다. 천천히 뛰는데도 지쳐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는게 아닌가. 그때는 왜 그럴까라는 생각으로 나를 분석하기보다, 천천히 뛰는데도 힘겨워하는 나를 바라보며 발만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온갖 생각들이 지나갔지만, 그건 내가 자의로 생각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7km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멈추기 직전이였는데, 뭔가 한가득했던 것이 밑둥 빠지듯이 쑤욱 내려가며 호흡과 온갖 망상이 일시에 고요해져버렸다.
‘이게 뭐지?’
번뇌 망상이 없고, 호흡이 고요해져서 나도 모르게 9km까지 내달렸다. 내 생애 가장 긴 거리를 뛰어낸 것인데, 게다가 마지막 2km는 도무지 어떻게 된건지 모르는 상태로, 나의 그날의 달리기를 마치게 된 것이다. 물론 달리기를 마치는 시점에는 그 고요한 상태가 다시 힘겨움으로 바뀌어서 멈추게 되었지만, 일순간 고요해지고, 그 고요에 머물며 달려나간 2km의 나의 상태가 신기했다.
샤워를 하고 그 순간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선원에서 수행할때 몰입에 들어갔던 것과 같았기에 달리기를 하며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에 대해 찾아보기로 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러너스 하이는 일시적인 행복감과 함께 불안감이 줄어들고 통증 역치가 높아지는 상태로, 장시간에 걸친 지속적인 적당한 신체 활동이나 짧은 시간 동안 고강도 운동을 하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다. 정확한 유병률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모든 운동선수가 경험하는 것은 아닌 비교적 드문 현상인 듯하다. 이 이름은 장거리 달리기에서 유래되었으며 조정에서는 "로워스 하이" 라고도 한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러너스하이는 미국의 심리학자인 A. J. 맨델이 1979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달리기 애호가들이 느끼는 도취감을 말합니다. 운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행복감으로도 불리며 그 행복감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느낌과 같다"라거나 "꽃밭을 걷고 있는 기분"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보통 1분에 120회 이상의 심장박동수로 30분 정도 달리다 보면 러너스하이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느낀 것이, 러너스 하이인 것도 같고,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잘은 모르겠다.
개인이 느끼는 감흥의 정도와 현상은 천차만별일 수 있으니 종합해보자면, 나는 기분의 고저가 있지는 않았다. 평온해지는 것과 기분이 고취되는 것을 구별 못할 수준은 아니니, 그 점이 달랐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또, 행복감보다는 무념무상처럼 착 가라앉아서 '평온'이 지속되는걸 관찰하며, 스스로 신기해하는 순간이었다. 평온을 행복감으로 해석하자면 그럴 수도 있으니 수행자는 스스로 점검해봐야할 부분이겠다.
내가 선원에서 머물며 수행을 할때, 함께 지냈던 도반들이 있는데, 그 중 한 스님이 쓴 글에 이런 말이 있었다.
‘연장만 갈고 닦지 말고, 풀을 뽑자.’
이 말 뜻은 도구에 매몰되어 참다운 수행을 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해주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몸만 가꾸고 내용은 없는 그런 운동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내 경험을 예로들자면, 모든 수행은 연장을 갈고 닦아도 풀을 뽑는 것이 되었고, 풀을 뽑는다고 한 것이 연장을 갈고 닦는 것이 되기도 했었다.
우리가 내면을 수행한다는 것이, 어떤 신비체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건 이제 누구나 알게된 시대이다. 내면의 지혜가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언행과 지혜의 일치를 중요하게 봐야하는 것이다.
대신 태도가 좋다고 해서 지혜가 꼭 있는 것도 아니고, 신비체험이 있다고 해서 꼭 태도가 좋다는 공식은 이뤄질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우고, 더 나아가 확장된 경험에 지혜로 관통되어야 한다.
나의 달리기(연장)가 풀을 뽑는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것은 나만 아는 경험이지만, 풀을 뽑고 간결해진 자유로움으로 말해줄 날이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