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승려는 뛰면 안되, 위의가 떨어져
#3.
도시에 나와 게으른 아침을 맞이하는게 요즘의 일상이다. 느긋이 일어나 양치하고 명상하다가 고요해지면 몰려오는 졸음에 다시 오전에 꿀같은 잠을 잔 적이 많다.
깊은 한 밤중보다 왜 그리 이른 아침에 깊은 잠을 자게 되고, 깨고나면 확실히 피곤이 덜한지. 그 달콤함에 젖어버린걸까, 몸이 필요해서 채우고 있는 것일까. 변명에 변명을 가져다 붙여도 치열함이 사라진 한심한 나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 등골이 시리다.
이렇게 늙다가는 애초에 마음먹었던 수행의 결과물을 구경도 못해보고 죽음을 맞이할까 싶어서 걱정이다. 예전에 수행했던 체험속에서 살아가는 추억팔이 노인이 되어버릴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어린시절 선원에서 꽤 치열하게 정진했던 나는 어디가고, 중년이상의 나이에 한없이 게을러보이는 한심한 중이 되어버린지 꽤 시간이 흘렀다.
공양을 마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음이 쫓기지 않으면 한없이 느긋해지지만, 횡단보도 파란불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곧 빨간불로 바뀌려는지 깜박이기 시작한다. 바쁜일도 없으면서 다음 신호때까지 기다리기 싫어서 뛰었다.
승복입고 뛰는 그 경박함은 내 뇌리에 박힌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파생되는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승려는 뛰면 안되, 위의가 떨어져.'
이건 교육되어진 내용이지만, 내가 봐도 승복입고 뛰는 모습을 보는건 참 멋이 없다.(훗날 바뀌게 되지만)
가까스로 신호가 바뀌기 전 반대편에 다다랐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잠깐 섰다가 다시 걷는다. 그거 조금 뛰었다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안정되길 기다렸다가, 다시 걷는 이 야박한 몸뚱아리. 땀도 꽤 흘러내린다.
예전엔 줄넘기도 잘했고, 등산도 잘 했었는데, 요거 뛰었다고 힘겨워하다니 이상하네. 위기감이 엄습한다. 몸에 문제가 있는건 아니겠지?
어떤 증상이 있어서라기보다, 서서히 불어난 몸과 뱃살에 내 몸의 기능들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떤 순간에 맞닥뜨려진 인식의 순간, 변화하는 내 모습에 걱정이 일어난다.
이런 체력으로는 수행도 어렵겠다는 생각에 동네 헬스장으로 가서 운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행자에게 진정한 위의는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수반되어야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개인적 생각에 뭐든 시작해보자는 식으로 등록을 했다.
이때도 내가 뛰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러닝머신은 헬스장의 장식품이고, 여자들만 주로 사용하는 기구쯤으로 알고 있었던 나였다.
수행자라면 변하는 몸의 상태를 무상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수행을 이어가야하겠지만, 바라보되 너무 쉬이 지치고 일상에 지장을 준다면 이저저도 안되는 기생충이 되어버릴 수 있지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현진스님의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제는 법당에서 묵상이나 강연보다는 정원 가꾸기에 더 신경 쓰는 편이다. 아무래도 종교적 직무보다는 자연적 직무가 좋아서일까. 법당이나 선실보다는 정원에 자꾸 눈길이 가고, 그 일에 의지하고 싶다. 어쩌면 정원에서 맑고 투명한 시간을 누리면서 소란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때문이다.”
그 분의 도량은 참 아름다운데, 그 아룸다움은 그 분이 도량(정원)을 돌보는 마음이 수행의 확장이었기 때문이리라. 종교적 직무도 소중하고 이어가야할 부분이지만, 때에 따라 내 종교적 직무가 확장되려면 그 곳에서 깨우친 것이 어떤 일에서도 발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장소에서라도 발휘되어야할 내 지혜가, 현저히 떨어져서 숨쉬기 어렵다면 내 역량을 키우던지, 내 역량만큼만 소화해내던지 택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은 체력적 한계에 선을 긋고 멈추기보다 조금 애써보자고 결정한 것이다.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는 계속 나에게 물어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