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감이 깃드는 곳에도
무더운 여름이면 생각도 잠시 더위를 피해줘야 할 것 같아요.
이글거리는 한 낮의 태양으로, 바람마저 뜨거운 도시의 열기를 잠시 내려놓고자,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산사로 향하는 몸과 마음을 바라보니, 어느새 청량함을 느끼게 되네요.
잠시 부석사 종무소 앞 툇마루에 앉아 부처님 오신날 걸었던 등을 봅니다.
마음의 청량감을 위한 수 많은 이야기들과 수행방법들이 불가에는 있지요.
거문고의 줄을 다듬는 비유처럼 일상의 이야기부터
특별히 전해오는 수행방법의 차제들까지...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다양해서, 그것이 어찌되었든 각자에게 맞는법을 찾아,
스스로 나아간다면 그 방법이 최선의 선택이 되겠죠.
매번 선택했던 방법이 들어맞기도 하지만, 기후와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하는 선택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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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옛날, 청정하고 신앙심 깊은 보살이 있었습니다.
마을 근처에 지장보살님이 인도하는 반야용선이 도착했는데, 그것을 타려던 보살이 자식들과 눈물의 이별 시간을 너무 보낸 나머지, 시간을 놓쳐 뒤늦게 당도한 나루터에 용선이 떠나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나루터에서 애원하는 보살이 측은하여 지장보살님이 용선에서 밧줄하나를 늘어뜨려 주었는데, 그것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티어, 극락정토에 다다르게 되었다지요.
그 보살의 이름이 바로 '악착보살'입니다.
청도 운문사에 가면 그 악착보살 조형물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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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은 시절, '악착'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 너무 어울리려나요?
너무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라, 쉬라는 말도, 애써보라는 말도 쉽지가 않네요.
자칫, 겨우겨우 연명하듯 애쓰는 이들에게 가학적인 단어가 되지않을까해서 말입니다.
수행에 있어서도, 악착같은 자세와 마음가짐이 때론 필요합니다.
'때론'이라는 단어가 빠질 수 없는 이유는, 노력과 애씀 안에도 치우친 마음이 일어,
조절과 취사선택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마음에 지나친 악착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면서도 꾸준히, 지속적이게 하는 방법이라고 해야할까요?
아무튼 그런 자세는 어떤 사회 속에 있든, 필요한 자세임에는 틀림이 없어보입니다.
초파일에 등을 달아 기원하는 풍습은 '빈자의 일등'이라는 일화에서부터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지만,
등을 달아 기원하는 마음에, 왠일인지 악착보살의 마음이 오버랩되는군요.
찰나찰나 바라보고, 념념상속 되어야하는 우리의 수행주제는, 악착과도 맞닿는 부분이 있지 않나 싶어요.
본질을 잊고 살기 쉬운 세상의 삶 속에, 일년에 한번이라도 등을 달거나, 사찰에 와서 기도를 붙이고, 불공을 드리는 마음안에도 그 염원하는 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녹여져 있기 때문에, 악착보살의 마음이 저 초파일에 달아놓은 등과 함께 보여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법당이 반양용선이고, 그 용선 안에는 사부대중이 함께 하고 있으며, 염원과 발원, 지속적인 기도로 우리를 저 피안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중이기에 장엄된 모든 조형물들이 그렇게 하나됨으로 볼 수 있지않나 싶네요.
각자의 모습이 여법한 사부대중의 일원으로 함께하든,
발원으로 담아놓은 등의 품성이든,
힘겹게 버텨가는 악착보살의 마음이든지
기우는 마음의 지점을 확인하며, 청량감 감도는 내 마음의 피안으로 건너가야 하지 않을까요.
도피처가 아닌 도피안으로 말이죠.
어라의 숨고르기 http://blog.naver.com/kns6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