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 관리
한국의 밤 문화는 화려하다.
홍대, 이태원, 강남, …… 낮과 밤 구별 없이 24시간을 논스톱으로 달리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역동성이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원동력이 아닐까? 변변찮은 지하자원 하나 없는 초라한 현실과 끊임없던 외세의 수탈, 그리고 잔혹한 전쟁의 폐허마저도 꿋꿋이 딛고 일어선 오뚝이 같은 나라. 미미하던 존재가치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꿔치기 해버린 초고속 성장의 배경에는 쉼 없이 내달리는 역동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가다 보니 주위를 찬찬히 돌아볼 여유가 없다. 건정건정 땜질하듯 마무리하고 급하게 다음으로 달려가기 일쑤다. 일단 눈에 보이는 구멍만 메워놓으면 그만이란 생각. ‘눈 가리고 아옹’이 따로 없다. 그러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 사달이 난다. 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순식간에 둑을 무너뜨리고, 다리를 끊어지게 하고, 배를 가라앉히는 꼴이다. 별것 아닌 듯했던 문제점의 한겹을 벗겨보면 또 다른 문제점이 등장한다. 만약 그 문제점의 실상을 찬찬히 살펴보기라도 할라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엮여 나오는 온갖 문제와 비리들을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끼리끼리 다 해먹는다’는 비아냥의 근원이기도 하다. 학연, 지연, 혈연에다 이제는 SNS로 대변되는 디지털 인맥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연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닐까?
매달 한번씩 지역 상공회의소 조찬 강연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이 강연회를 주관하는 상공회의소 단체에는 골프나 등산 같은 별도의 하부 모임들이 있고, 각 기수별로 또 유사한 모임이 있다. 초기엔 전체 행사나 동기모임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고 친목도 다지고 그랬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발길이 뜸해졌고 이젠 아주 소원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강연회 이외의 행사에는 좀처럼 발길을 하지 않는다.
또 직장이나 동호회, 그리고 동창회 같은 단체에서 실시하는 행사도 꽤 된다. 이런 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얼굴 도장을 찍으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변화의 미친 속도와 끼리끼리 문화가 대세인 한국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잘해야 한다’, ‘네트워킹에 강해야 한다’는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분위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것. 얼마나 좋은가? 나 역시 그런 자리를 즐겨하고 더불어 즐기는 술 주량도 남들 기분 맞출 정도는 된다. 그런데 이런 모임은 어지간해서는 간단히 끝나는 법이 없다. 2차, 3차…… 때로는 마치 끝을 볼 기세로 겁나게 달린다. 너무 역동적이라 그런지 몰라도 부담이 한아름이다. 연차로 내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는 것도 그렇고, 영혼 없는 대화로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도 부담스럽다. 불편해하다 보니 차츰 발길이 잦아들고, 점차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는 나를 본다. 남들은 기를 쓰고 네트워크를 늘이기 위해 노력한다는데, 나는 있는 네트워크도 다 끊어지게 생겼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러다 외톨이 신세가 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연유로 두어 번 한국을 떠났다 돌아 오다를 반복하다 보니 그나마 양쪽 모두 연락하던 친구들과도 소원해진지 오래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굳이 발 벗고 찾아 나설 생각은 없다. 아마도 나의 성정이 원래부터 그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나이를 드니 ‘짚신의 법칙’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젠 ‘인간관계’ 내지 ‘네트워크’란 말에 혹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억지로 연줄을 맺고자 애쓰고 싶지 않음이다. 단지 나와 통하는 사람 몇, 그리고 나와 마음이 맞는 모임 한두 개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덕분에 남아도는 시간이 있다면 나 자신을 들여다 보고 가족들 챙기는데 더 쓰면 되지 않겠나.
내가 경험한 외국서의 생활은 철저한 가족중심이었다. 주중에는 무조건 가족과 함께이다. 학생 때나 직장에 다닐 때도 예측 불가한 회식이니 모임은 거의 전무 하다시피 했다. 주말이면 교우들의 집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파티를 연다. 파티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인 조곤조곤한 대화를 나누는 식사가 일반적이다. 음식 역시 메인 음식인 바비큐와 샐러드에 각자 집에서 가지고 온 요리 한 가지씩을 더하는 단출한 경우가 많았다. 술을 마셔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는 경우는 좀체 없다. 다들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의 음주에 다양한 주제를 안주 삼아 유쾌한 대화를 나눈다. 가족 전체가 함께 어울리기도 하지만 종종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신의 관심사에 맞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매달 참석하는 지역 상공회의소 조찬 강연회에는 사회적으로 꽤나 성공했다는 명망 있는 전문가들이 종종 강사로 등장한다. 한정된 강연 주제나 시간 관계상 후 순위로 밀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가끔 등장하는 공통적인 레퍼토리가 하나 있다.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제일 중요한 것 하나를 잊고 지내다 뒤늦게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는 자성이다.
가장 소중한 곳,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 맞다. 그것은 바로 가정이고 가족이다.
“나름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자리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자신의 가정과 가족들은 그 자리에 없더라”
라는 강사의 고백을 들으며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혹여 여러분은 인간관계란 말에 현혹되고 네트워크란 말을 핑계 삼아 억지로 남과 맞추기 위한 부질없는 노력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또 크고 다양할지는 모르지만 지나치게 가벼울 수도 있는 인맥 넓히기에 혈안이 되어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되짚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