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공룡능선 종주기
어느 산악인이 이런 얘길 했다 한다.
“공룡능선을 타보지 않고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마라.”
우연히 듣게 된 설악산 공룡능선 얘기가 유난히 귀에 꽂혔다. 등산에 그닥 큰 관심을 두지 않던 나로서도 솔깃한~~! 몇몇 동료들의 적극적인 참가 의지 속에 나도 모르게 “그럼 나도~!” 하고 손을 들어 버렸다. 호기심 반, 도전 의지 반이 적당이 버무려진 일단의 저지르기 시도였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23km짜리 산행길 아니 고행길이었다. 야릇한 긴장과 흥분감에 버스에서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 4시경에 한계령에 도착하니 아직 어둠이 짙고 바람은 매서웠다. 한계령에서 서북능을 타고 끝청과 중청을 거쳐 회운각 대피소까지가 첫 번째 단계다.
약 5시간 30분 정도 소요된 이 길은 꽤 경사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무난한 편이었다. 하지만 등산로 주변은 자욱한 안개로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회운각 대피소에서의 늦은 아침. 시원한 막걸리를 곁들인 전투식량에다 따끈한 라면까지. 땀 흘리고 난 후의 만찬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 이런 산속에서라면 더욱~!
이제 선택의 순간이다. 천불동 계곡을 통해 설악동으로 하산하는 B코스인지, 아니면 공룡 능선을 거쳐 마등령, 비선대를 통해 설악동으로 가는 A코스인지 결정해야 한다. 애초에 내 수준을 감안해서 B코스를 내심 마음에 두었었다. 게다가 무릎에 간헐적인 적신호도 왔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다 공룡능선을 못 보고 그냥 내려간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게다가 언제 다시 이곳에 와보겠냐는 주변의 권고에 그만 귀가 얇아져 무리수를 두기로 했다.
“악~!”소리가 절로 나오는 곳. 여기가 왜 설악~!산인지를 새삼 되뇌게 해준다.
좁고 긴 미로 같은 수풀 길을 뚫고……
곳곳을 이어주는 미끄러운 철계단을 조심조심…… 계속해서 전진이다.
시간은 흐르고 온몸은 또다시 땀으로 범벅이다. 하지만 운무의 바다 속에 침잠한 설악은 좀처럼 그 자태를 드러내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 우리의 애틋함을 즐기는 듯한 설악은 밀당의 고수임에 분명했다.
마침내 운무가 걷히고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우리 일행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경외감, 찬미와 감탄.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랴.
설악의 숨겨진 속살을 잠시나마 들여다보는 행운과 감동은 그 지난한 과정에서 오는 고통과 인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아 넘쳐 흘렀다.
왜 사람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이 고된 여정을 택하는지 조금은 알 듯했다.
공룡능선 등반이 어려운 이유는 시작점이 남다르다는 점에 있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이상 5~6시간 정도 등반을 하면 체력적으로 한 번쯤 조정 시점이 온다. 하산 시간까지 감안해서 적절한 비축과 관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공룡능선은 바로 이 지점이 시작부분이다.
당일 코스로 종주를 선택하는 경우, 총 13~15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체력 조절에 실패하면 막판에 무자비한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엄청난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공룡능선은 말 그대로 공룡의 거친 등을 연상케 할 만큼 날것 그대로인 험난함의 연속이다.
물론 지나고 나서야 백 번 천 번 잘했단 생각이 들지만 등반 중에는 가끔씩 속에서 천불이 나기도 (천불동으로 갈 걸 그랬나?) 했다. 끊임없이 막아서는 곳곳의 코스가 상당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거의 마지막 단계인 마등령에서 비선대까지의 코스가 가장 환상적? 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험하고 다리 풀리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지랄 맞은 코스……^^ “아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ㅠㅠ
언제까지나 이어질 듯하던 그 고난의 길도 마침내 끝이 났다. 잠시 숨을 돌려 비선대의 아름다움 속에 빠져 들었다. 등반 내내 흩날리던 빗방울이 조금씩 강해지나 싶더니 열기로 붉어진 얼굴을 촉촉이 적셔준다.
그렇게 설악산 공룡능선 종주를 어렵사리 마무리했다. 언제 다시 이곳을 찾게 될지 알 수 없어 더욱 애틋하고 소중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난 그날, 14시간에 걸친 생생한 기억들을 가슴 한 켠에 빼곡히 채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