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와 멘토의 육하원칙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많이 안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조금 안다고 해서 못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가르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가르치는 행위에는 ‘무엇(what)을’과 ‘어떻게(how)’라는 단어가 앞장선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왜(why)’ 까지 아우르는 육하원칙이 모두 동원되어야 맞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의 소유자라도 전달방식이 서투르면 흥미와 효과는 반감되는 법이다. 물론 겉만 번지르르한 전달방식이 부족한 알맹이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동일한 내용이라도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따라 그 반응과 효과는 천차만별이다.
최근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 온라인, 오프라인 등 강의가 벌어지는 플랫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가히 강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유명하다는 강사들의 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지 무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강의는 정말 지루하고, 어떤 강의는 참 재미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
사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대부분의 강의 내용은 거기서 거기일 때가 많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자기계발 이론들을 짜깁기하거나 한번 만들어둔 커리큘럼을 수년간 반복해서 써먹는 경우도 낯설지 않다. 강사 스스로도 책 한 권 쓰고, 같은 내용을 여러 곳에 가서 매미처럼 반복하는 상황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을 터. 강사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소위 ‘무슨무슨 대표’라는 분들도 고민이 참 많을 듯싶다. 매번 새로워지기 위해 고군분투를 아끼지 않아야 하니까 말이다.
흔히 강의를 잘하는 사람을 ‘명강사’라 부른다. 명강사는 그들만의 노하우와 필살기가 있다. 무엇보다 이들의 강의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특징을 가진다.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강사와 조우하면 나도 모르게 빠져 드는 느낌이 든다. 마치 스토리텔러 같기도 하고, 무대 위에 선 연극배우나 개그맨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실제 배우나 개그맨도 강의를 많이 한다. 브랜드 지명도가 있어 강사료도 웬만한 일반 강사의 몇 곱절 수준이란다)
이들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다. 명강사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을 접목해서 창의적으로 풀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통적인 교수법을 바탕으로 한 주입식 강의는 한물간 지 오래다. 새로움을 갈망하는 청중들의 기대와 높아진 눈높이를 만족시켜야 하는 건 오롯이 강사의 몫이다. 강사는 널려 있는데, 명강사는 손가락을 꼽게 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강사도 발전을 위한 체험과 학습을 멈추지 않는다.
이론에 더한 개인의 경험담이 우러나오면 자연스럽게 몰입도가 높아진다. 단지 이론이 이론에 그치게 되면 껍데기만 쥔 듯한 기분? 입만 갖고 내 시간을 털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강의를 해야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실제로 매달 참석하는 조찬강연회나 각종 세미나에서 이런 감정들이 뒤죽박죽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일로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사회나 가정, 조직, 각종 단체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대체로 연배가 높은 축의 몫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이와 경험이 많다고 해서 상대방을 가르치는 일이 결코 만만치만은 않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자칫 누굴 가르친다고 어쭙잖게 행동했다간 "꼰대가 꼴깞떤다"는 소리가 날아들 수도 있음이다.
가르침이란 어쩌면 멘토와 꼰대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위험한 줄타기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말도 통하지 않으면 잔소리일 뿐이다. 심하면 멍멍이 소리로 전락하는 것이고. 가르침을 전하는 이와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과 자세에 따라 전혀 다른 종착지를 향하게 된다. 소통이 잘 되기 위해서는 나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설령 잘 알지는 못한다 해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그 노력이 가상타 하여 꼰대에서 아재로 호칭이 격상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다면, 먼저 나의 관점이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진정성’에 마음을 열고, 작은 공간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보는 왼쪽 칼럼은 어느 신문에서 재미있게 본 '꼰대의 육하원칙'이다. 그리고 오른쪽은 그와 비교해 생각해본 '멘토의 육하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