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유치원 교사가 경험한 영어 하는 우리 아이 천재 아닐까 했던 순간
요즘 저희 아이들이 가장 관심 있는 것을 말하자면, 단연 '영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29개월 아이가 영어라니, 얼마 전 핫하게 떠오른 '7세 고시'를 떠오르게 하는 말이지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제가 공립유치원 9년 차 교사였다는 것을 아신다면 정말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사는 지역에서 5-7세 아이들 대상으로 하는 공립유치원 특성화 프로그램으로 영어가 금지된 지 벌써 5년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어쩌면 누군가에게 저는 '변절자' 내지는 '매국(어)노'정도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도 아이를 낳기 전에는 영어 조기교육에 한해서 만큼은 '흥선대원군'에 가까웠으니까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치원과 어린이집 관리체계 이원화로 인해 어린이집에 대해서는 영어 특성화가 금지되어있지 않고, 현재까지도 그렇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아마 유보통합이 이루어지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요. 저희 아이들도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고, 특성화는 원칙상 선택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선택이 어렵기 때문에 주 2회 30분, 매일 10분의 영어수업을 받습니다. 덕분에 언어 폭발기인 지금은 굉장히 영어를 좋아합니다. 심지어는 "원숭이는 영어로 monkey야. 돌고래는 영어로 뭐야?"라고 묻기도 합니다. 엄마인 저는 이런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저는 안 그럴 줄 알았지만, '어머 우리 아이 천재 아닐까?'라는 이상한 감탄을 마음속으로 깊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마음이 어찌 행동으로 안 드러났을까요. 친인척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아이들에게 영단어 읊기를 장기처럼 시키거나, 영어에 관심을 보일 때 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우와 우리 아기 정말 잘한다."와 같은 감탄사를 곁들이면서요.
그런데 며칠 전 아이가 제게 "돌고래는 영어로 뭐야 엄마?"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고래, 코뿔소, 당나귀 등 좋아하는 동물의 영어이름을 줄줄이 물었습니다. 꽤나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대답해주고 있는데, 문득 아이들과 나누는 '이것이 과연 의미 있는 상호작용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하게 단어를 읊고 습득하는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모국어(한글)로 나누는 상호작용보다 과연 의미 있는가에 대해서요.
애석하게도 저는 이중언어자가 아니기에 아이들과 나누는 영어로의 상호작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단어와 간단한 문장 구사 수준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익숙한 모국어로의 대화는 보다 높은 수준의 문해력을 자극합니다. 오늘 '빨간 모자' 동화책을 읽다 보니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늑대가 음흉하게 웃으며 빨간 모자에게 말했습니다." 아이에게 "음흉하게 웃는 게 뭘까?"물었더니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답니다. 적어도 활짝 웃는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모르지만 '늑대는 나쁘니 나쁘게 웃었을 것이다.'란 추측을 머릿속에서 한 게 아닐까요? '커다란 순무'를 읽을 때는 본인이 순무가 되어 바닥에 웅크리더니 "강아지야 강아지야 나 좀 뽑아줘!"라고 이야기합니다. 첫째 둘째 셋째 순서대로 부르며 서로가 서로를 뽑아줍니다. 반복하고 쌓여가는 이야기의 구조를 말하며, 들으며, 놀며 온몸으로 익힙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빨간 모자나 커다란 순무를 예시로 들었지만 아주 단순한 한글 동화라도 익숙한 모국어는 단순 '언어'보다 높은 차원에서 '글의 구조, 문맥, 보다 풍요로운 단어'를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같은 시간을 보낸다면 어떤 상호작용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비단 동화책을 활용한 상호작용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익히는 다양한 단어와 표현들도 모국어로 할 때 훨씬 더 의미 있고 다채롭습니다.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이 보라색이네, 블루베리 같다" "해님이 구름 뒤로 쏙 숨었네. 뉘엿뉘엿한다."와 같은 익힌 단어를 직접 활용하는 과정을 경험하거나, "엄마는 아기들을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라는 말에 "엄마는 나를 빵만큼 사랑해?"하고 묻다가 '하늘만큼 땅만큼'이란 관용어구를 배우기도 하고, 비가 오는 차 안에서 "여기는 떼땨댱(세차장)이야. 자동차야 시원하니? 정말 시원하다"라고 비 오는 상황을 세차장에서의 상황으로 변환시키고, 무생물과 대화하는 듯한 상상적 언어적 표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아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육아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환경이 다른 아이들의 경우엔 이 이야기가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엄마로서도 교사로서도, 아이들과 이런 상호작용을 하는 시간이 보다 다채롭고, 의미 있으며, 즐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내 아이 천재일까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좀 더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하려고 노력해보려 합니다. 아이들과 걷는 이 길이 빠르게 가는 것이 중요한 대회나 경기가 아니라, 느리더라도 자세히, 꼼꼼히 그리고 무엇보다 즐겁게 주변을 살피고 걷는 산책길이라 생각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