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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으로 김재식 Apr 09. 2023

내 성전은 어디에?

그저 기도 84 - 동행


처음에는 우아하게 다니고 싶었다. 남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고 자기 스스로도 만족할만큼 가장 깨끗하고 잘 어울리는 옷으로 골라 입고 스스로 뿌듯할만큼 헌금도 준비해서 성경책 사이에 담아서 주일날 교회에 가고 싶었다. 어쩐지 그렇게하면 뭔가 훌륭한 신자로 인정받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두 난이도 높은 미션이 되어버렸다. 평일과 주일의 구분도 없어져버린 중증환자와 그 가족 보호자가 되니 주일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추어 교회에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나들이가 되었다. 그래도 큰 종합병원에 있을 때는 링거병과 소변주머니 등을 휠체어에 줄줄이 달고도 가능했다. 길도 턱이 없고 예배실도 잘 마련되어 환자들이 이용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점점 작은 병원으로 옮기고 재활요양병원으로 옮기고부터는 예배의 품질이랑 환경도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찬양대가 있는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병원 바깥의 큰교회를 나가보기도 했다. 작은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땀에 젖은 채 시간을 맞추느라 씨름을 했다. 게다가 거의 성한 사람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를 먼저 차지하고 타는 바람에 몇번이나 보낸 후에 가까스로 탈수 있었다. 예배후에도 다들 나가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한가해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교회를 나와 병원으로 돌아오고 했다.


그러나 오래 다니지 못했다. 그런 출입의 불편은 참고 다녔지만 도무지 배려가 없고 신체의 약자나 가난하여 교회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는 성도는 알게 모르게 소홀히 대해지고 있었다. 광고 시간에 자주 많은 헌금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소식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것도 조금씩 위축시켰고 심지어 설교 시간에조차 세상의 자랑거리가 모델처럼 거론되는게 고역이 되어 갔다. 병들고 가난해진 사람이 역설로 믿음이 적고 버림받아진 느낌이 드는 내용이 심히 괴롭기도 했다.


그런 교회의 분위기가 마음을 많이 힘들게 해서 결국 그만 나가기로 결심했다.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서민, 그리고 서민보다 더 낮은 처지의 사람은 교회에서도 그리 맘 편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아주 생생하게 매주 실감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대유행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모든 출입과 왕래가 통제되었다. 그나마 병원으로 매주 와서 예배를 진행하던 선교회조차 중단되었다. 어쩌면 약간의 핑계도 되고 마음의 불편을 지워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후 지키지 못하는 안식일 교회예배는 방송 설교로 대체되고 그나마도 무슨 일 생기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아무때나 이용하다가 건너 뛰기도 했다. 오래 자리잡은 습관인 안식일 예배를 지켜야 한다는 자책과 맘의 부담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어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 이참에 기독교 교인을 그만두자! 폼나게 출석할 수 없는 처지의 곤란함은 기독교인을 그만두면 더 이상은 남의 비난도 받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자책할 필요도 없어질테니!’


그런데 그런 실행도 쉽지 않았다. 기독교인을 탈퇴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신자의 신분이나  지적질은 피할 수 있지만 내 속에 자리잡은 신념과 고백은 그런 결정과는 별개로 아주 생생한 생명으로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젊은 날 직장을 골라가며 주일 쉬는 곳을 찾고 기꺼이 따라오는 손해나 몇가지 이익도 포기하고 주일을 지키던 때가 있었다. 마치 그렇지 않으면 뭔가 부도덕하고 거짓신자같아서였다. 지금도 곳곳에서 그걸 가장 첫째로 가는 기준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그때의 나름 실천이었고 지금 그러는 사람들도 그들에게는 가장 귀하게 바치는 값진 신앙 고백일것이다.


그렇게 선 순위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도 기뻐하며 보상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럴 형편이 안되는 사람이 그 선자리에서 장소가 어디든지 때가 언제든 하나님을 사모하며 말씀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사는 것을 똑같은 무게로 귀히 여겨주실 거라 믿는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험한 모든 일을 맡기고 넉넉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거룩하게 차려입고 성수주일을 자랑하던 이천년전 모습이 떠오른다. 양은 고사하고 비둘기도 살 수 없고 그 시간조차 바닷가나 시장 한구석에서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일해야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있다. 그들보다 높고 부유한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고급신자들에게 죄인으로 낙인 찍히는 신자들이 왜 지금 시대라고 없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세상 모든 현장이 수도원이고 성전이다. 큰 십자가가 세워진 높은 예배당 건물 밖에도 하나님은 계시고 어둡고 추운 길거리에도 하나님은 똑같이 계신다. 주일 예배시간에 하나님은 예배실에만 있는 것 아니라 세상 곳곳 삶의 현장에도 계시면서 그들과 동행해주실 것이라 믿는다. 비록 화려한 옷도 거룩한 성가도 못 부르지만 그들의 땀에 젖은 옷과 힘에 겨운 신음과 한숨도 기도처럼 놓치지 않고 들어주시리라 믿는다.


(2023. 4. 9.  맑은고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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