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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으로 김재식 Apr 24. 2020

당신의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알고 싶다


모든 텍스트text 는 콘텍스트context 를 요구한다. - 유시민은 그의 책 ‘유럽도시기행 1’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도시의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길과 공원,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text)일 뿐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 도시의 텍스트도 해석을 요구하는데, 그 요구에 응답하려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한다.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말한다. 도시의 건축물과 공간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 그들이 처해 있었던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하는 동안 텍스트를 이해하려 계속 콘텍스트를 검색하고 공부하면서 다녔다. 이 법칙은 문화 여행에만 적용되는걸까? 강준만은 그의 책 ‘재미있는 영어 인문학 이야기 3’에서 콘텍스트를 이렇게 비유를 했다.

‘context는 ‘(어떤 일의) 맥락, 전후 사정, (글의) 맥락, 문맥’이란 뜻으로는 ‘함께 엮어 짜거나 꼬다’라는 뜻의 라틴어 contexere에서 유래했다. 즉, 하나의 경험에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선 어떤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지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는 걸 시사한다.
“공부해라.”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이 말은 텍스트(text)다. 이 말을 어떤 상황에서 했느냐 하는 건 이 말을 평가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낮에 했다면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밤 12시에 했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지독한 부모’라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밤 12시라고 하는 상황이 바로 콘텍스트(context)다. 물론 콘텍스트는 그런 시간적 상황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을 말한다.’

도시를 만들게 한 배경 이유 환경 감정 역사 등이 콘텍스트고, 그로인해 드러난 게 도시라는. 텍스트라면, 사람의 드러난 모습도 하나의 텍스트일 수 있다. 그래서 겉만 보고 나타난 말만 보고 사람을 이해하면 부족하다.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오해와 편견은 상대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나를 동시에 망쳐 마침내는 지금 시간과 지금 장소까지 망치게 한다. 사람의 콘텍스트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고 방어다.

신앙인의 텍스트는 뭘까? 어떤 사람의 직급, 장로 집사 목사 등의 지위와 그의 소속, 경력과 보수와 진보 어느 방면의 신앙노선, 등이 해당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의 콘텍스트를 알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떤 동기로 신앙의 문을 들어섰는지, 어떤 성품과 생각들이 그를 꾸준히 반복되는 신앙생활 습관을 만들며 여기까지 왔는지, 그 과정에 그가 어떤 경우에 울고 웃으며, 감사와 좌절, 불신의 위기를 넘어왔는지 알면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될거다.

그 콘텍스트를 잘 모르면서 단정하고 편견으로 그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이 잘못일수도 있다. ‘미필적고의에 의한 죄’ 정도?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사람을 그렇게 알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고 인사도 멀리 해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 정도에 맞게 아는 척 하고 그만큼만 단정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텍스트만 알면서 아는 정도보다 더 많이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험담도 나오고 비방과 참소하는 혀도 된다. 오해로 사랑의 탑이 좌절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흥준 교수에 의해 널리 알려진 글귀는 이렇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본래 인용된 원문,  조선시대 문인 유한준(1732-1811)이 석농 김광국에 보내는 화첩 ‘석농화원’ 에 적혀져 있던 글은 조금 순서가 다르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 而非徒畜也
지즉위진애 , 애즉위진간, 간즉축지, 이비도축야’

​해석은 이렇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뭐 크게 다를 건 없다. 의미 순서가 바뀌어야 하지만.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의미는 어느 신앙의 의미와도 닮았다. 성경에서도 그랬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온전히 다 알게 되는 상태가 천국이라고 말한다. 천국은 오해와 단정과 편견의 관계로는 오지 못한다. 나는 당신의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알고 싶다. 그러기 전까지는 섣부른 단정과 주장과 강요를 미루어야겠다. 당신의 콘텍스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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