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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으로 김재식 Nov 15. 2022

이야기 둘 - 목마른 사람


2화 목마른사람        

                                

#1...   

  

사생결단을 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승주는 벼랑 끝에서 더 물러나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며 엄마와 마주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통장에서 이달 치 연금 들어온 거 엄마가 가져갔지? 우리 다 망하자는 거야? 길거리로 나가 앉아서 굶어죽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좀 그만할 수 없어? 누가 누구를 도와야 하는 거야? 우리부터 좀 살려달라고 해! 정말 너무해 엄마!”

“승질부터 내지 말고! 누굴 닮아서… 내 말 좀 들어봐,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무슨 말을 들어? 그거 이달 생활비란 말이야! 그거 없으면 방세도 못 내고 연주 학원비도 못 내고... 밥은 뭘로 먹어? 모래 퍼다가 밥 지어줘? 내가 무슨 요술부리는 지니야?”

“지난번처럼 옆집에 가서 조금만 빌려... 다음 달 연금 나오면 갚아주면 되잖아!”

“못살아! 내가...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또 돈 갖다 바쳐야 하는데? 또 교주님 생신이야? 그건 두 달 전에 했잖아! 아님... 또 무슨 집회 참가비야? 몇 날 며칠 숙박비야? 그거도 한지 석 달도 안되었잖아! 도대체 그놈의 교회는 왜 그리 돈을 자주 내라고 한 대?”

“기집애... 지 에미에게 말하는 싸가지 좀 봐? 야! 막말로 그 돈이 내 앞으로 나오는 거지 니거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엄마가 그 돈 가지고 살림 다 살아! 난 집 나갈 거야! 정수랑 연주 죽든지 살든지 난 신경 안쓸테니 엄마 맘대로 하라고! 나도 혼자 나가서 속편히 살고 싶어! 진절머리 나는 이 살림 때려치우고!”

“또! 또 협박질이야! 저놈의 기집애는 내가 허리 병 때문에 살림 힘드는 거 알면서 걸핏하면 집 나간다고 몰아세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생활비 싹 인출해서 그놈의 교회 갖다 바치는 거 좀 그만하라고! 뭘 먹고 살아? 살림은 뭐 신데렐라 요정처럼 막대기만 휘두르면 호박이 마차 되고 모래가 쌀로 바뀌는 줄 알아? 제발 정신 좀 차려줘 엄마!”

“알았어!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좀 그만해! 앞으론 목돈으로 안 가져가면 되잖아!”

“아, 그러니까 이제는 일수 찍듯 날마다 나눠서 솔솔 인출 해서 가져가겠다고? 아버지는 왜 연금을 엄마 앞으로 타게 만들어서 이 사단을 나게 하는 지... 아빠에게 따지고 싶어 정말...”     


승주 아버지는 오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유족 연금은 당연히 배우자인 엄마에게 돌아왔다. 재혼하지만 않는다면 그 자격은 계속된다. 허리 디스크가 심해 살림이 힘들어 엄마 대신 맏딸 승주는 살림을 맡아 온 지 오래되었다. 자기 꿈 자기 미래 계획은 세울 수도 없어서 한동안은 우울하고 비관했지만 아래 남동생 정수와 막내 연주가 자립할 때까지만 미루기로 작정하고 마음을 비웠다. 매달 엄마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들어오는 연금으로 빠듯하지만 생활을 꾸려 가는 중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자주 엄마는 그 통장에서 돈이 들어오는 날 몽땅 인출 해서 요즘 부쩍 발길이 잦아진 이상한 교회에 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승주는 한바탕 집을 뒤집어 놓으며 싸우고 달래고 했지만, 점점 그 간격이 짧아지고 있어서 속이 상했다. 무슨 장식품이나 화분 식물처럼 내다 버릴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2...     


“여보슈! 처자, 땅 꺼지겠어! 왜 그렇게 아래만 보며 한숨을 그리 쉬는 거야?”

“휴... 누가 제 속을 알겠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기 맑은 하늘도 좀 보고 그래요! 그래야 맘이 풀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바뀌어 새로운 생각도 나는 법이유!”

“에구, 할아버지!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늘 본다고 방법이 나오고 이 죽을 지경이 달라질 수만 있다면. 그럼 아주 목이 빠져도 종일도 쳐다보겠어요!”

“누가 알어? 하늘 대신 나를 쳐다보며 털어놓으면 길이 열릴지! 하하하!”     


그제야 문득 내가 지금 누구와 말하는 거지? 생각이 퍼뜩 든 승주는 곁에서 말하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도 없이 무너질 것 같은 고민과 잔뜩 찌푸린 감정으로 터덜터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있는 외진 공원 벤치에 앉으면서도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누구를 살필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벤치 옆에는 전에는 못보던 할아버지가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이름 풀이. 우환 상담. 애정 궁합’ 그런 홍보용 단어를 삐뚤삐뚤 옛날 글씨체로 쓴 팻말을 걸어 놓고 책 몇 권을 쌓아 놓은 작은 상자가 있었다.   

  

“할아버지! 여기는 사람 왕래도 별로 없는 외진 곳인데... 여기서 무슨 장사가 된다고 자리를 폈어요?”

“그러게말이야! 흐흐!”

“그리고 요즘은 사주카페니 인터넷으로 다 보고해서 길에서 별로 안 봐요! 시대가 바뀌었는데 이런 옛날 방식으로 하셔서 밥이나 드시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 얼굴을 보던 승주는 아차! 싶었다. 정말 밥도 못 드신 듯 허기진 모습에 입도 마르신 초췌한 느낌에 맘이 짠하게 아려 왔다. 괜한 말을 해서 더 슬픈 마음을 안겨드린 것 같아 죄송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이것 좀 드세요! 진짜 맛있는 빵인데요. 제 동생이 무지 좋아하는 거라 자주 사는데 오늘은 1+1으로 하나를 더 주더라구요! 아마 할아버지 드실 복이었나 봐요!”

“그래도 될까? 사실 배가 좀 많이 고픈데 어디 가서 먹기도 귀찮고 하던 참이라...”

“그럼요! 공짜로 생긴 건 사실 쉽게 나가야 다음 복이 또 들어 온다더라구요! 그런 거 챙겨서 부자 안된다고 누가 그랬어요! 크크”

“고맙수! 그럼... 잘 먹겠수!”     


할아버지는 정말 많이 시장하셨는지 느리지만 꼭꼭 씹어가며 쉬지 않고 그 빵을 먹었다. 승주는 마트 봉지를 뒤적여 같이 산 오렌지 쥬스를 꺼냈다. 허기진 상태에 저렇게 마른 빵을 계속 먹다가는 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다른 어떤 음료수도 안 먹는 남동생 정수는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오직 오렌지 쥬스만 찾았다. 그때 안 먹으면 영락없이 된통 감기몸살을 앓는 이상한 체질 때문에 승주는 집 냉장고에 오렌지 쥬스는 떨어지지 않게 사놓곤 했다.     


“어이쿠! 그래도 되나? 처자가 어렵게 장 본 거 너무 축내는 거 같은데?”

“그냥 드세요! 뭐 빵 드시다 행여나 목 막히시면 제가 더 미안해지지요!”

“그래, 그럼 일단 잘 마시고... 빵값은 해야겠지?”

“되었어요! 그런 거 바라지 않아요! 괜히 부담 가지지 마시구요!”

“그건 처자 입장이고! 난 밥값을 평생하고 사는 사람이라~ 흐흐!”

“돈 안 받아요! 할아버지!”

“돈 아니고... 보자, 처자가 땅 꺼지게 한숨 쉬던 이야기나 털어놓아요!”

“그럼 뭔 수가 나나요? 괜히 제 속만 한 번 더 끌탕이지요”

“글세... 끌탕이 날지 불을 끌지 들어 봐야 알겠지?”     


승주는 답답하던 마음을 풀어놓으면 좀 기분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엄마의 이상한 교회 출입을 말하기 시작했다.     


#3...     


“야! 이 사기꾼아! 우리 곗돈 내놔!”

“그러게 어디서 우릴 만만히 보고 이런 속임수를 쳐?”

“아니라니까... 내가 꼭 갚아줄게! 좀 시간만 달라고...”

“이젠 안 믿어! 도대체 몇 사람이나 속이고 돈 빼먹은 거야?”

“처음부터 믿지 말아야 하는데! 딸래미가 하도 성실해서 믿고 가입해줬더니 등을 쳐?”

“요리조리 거짓말에 미루며 빼간 곗돈이 자그만치 천만 원이 넘어! 얼른 내놓아!”     


그렇게 씩씩거리며 몰려온 3명의 아주머니는 승주 엄마가 다니는 교회 모임 집을 뒤집어 놓았다. 가장 먼저 계돈을 타 먹고 이후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내거나 빌려서 돌려막고 빼먹은 계가 다섯 곳, 천만 원 넘는 금액이 되었다. 승주를 잘 아는 이웃 아주머니들은 이제는 더 못 참는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와서 행패에 가까운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치느라 곗돈을 빼돌렸다는 거지?

”뭐야? 그럼 이 사람들 공범이잖아? 시키고 돈 받고!“

”안되겠네!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가라고 해야지!

언론에 고발해서 다른 사람들 속지 않게 해야되는거 아냐?“    

 

사흘째 계속된 난리법석에 승주 엄마가 나가는 교회의 작은 집 모임은 처음에는 막으며 몸으로 밀어내고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하고 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들의 억센 행동은 괜히 ‘아줌마’라는 단어를 만들어 내게 했을까? 할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 어느 외국 어학사전에 아줌마라는 해석은 말릴 수 없는 불가사의 결혼한 중년 여자들이라는 의미로 실렸다던가? 그러니 만만치 않은데다, 돈이 관련되었으니 더 험악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경찰에 신고하고 언론에 제보해서 일을 키우겠다는 엄포에는 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기... 승주 엄마, 저 아주머니들 막무가내고 말이 안 통하잖아? 그리고 이웃에 소문도 나고 잘못하면 신고도 들어갈지 모르니... 좀 당분간은 나오지 말고 집에서 지내는 게 어때요?”

“그래도... 여기 안 나오면 난 답답해서 못 지내는데”

“이번 일만 해결하고 나면 또 나오면 되지!”     


엿새째 되는 날, 승주 엄마가 날마다 오던 그 모임의 집은 문이 잠겨버렸다. 단지 승주 엄마를 못 오게 하려는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지만 조금씩 태도가 변하던 그 교회 간부는 폐쇄를 해버린 것이었다. 그날 밤, 승주 엄마는 티비에서 뉴스를 보며 심한 혼란과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 티비 뉴스에서 사이비 교회에 빠져 집을 등지고 자식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사는 마누라를 내놓으라며 싸우던 남자가 칼부림을 해서 사람이 중상을 입은 기사가 계속 나왔다. 화면에는 싸우는 모습과 엉망이 된 입구와 피흘린 바닥까지... 가슴이 철렁했다. 어쩌면 자기가 나가는 곳과 같은 교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얼마 전 딸 승주와 담판을 지은 내용이 떠올랐다.     

“엄마, 그러니까 내 말은 나하고 마지막 담판 내기를 하자고!”

“에이, 그런 짓을 왜 해? 쓸데없이!”

“아니라니까! 엄마가 그렇게 믿고 엄마를 돌봐줄 거라고 믿는 게 맞으면 아마 엄마를 외면하지 않을 거야! 그럼... 앞으로 엄마가 교회를 나가든 돈을 갖다 바치든 일체 잔소리 안 할게! 약속해!”

“정말? 그러면 일주일만 시험해 보고 아무 탈 없이 내 말이 맞으면 내가 하는 대로 허락하는 거지?”

“그래, 대신 절대 그쪽에 알려주면 안 돼! 엄마가 슬쩍 눈치채도록 말하거나 비협조적으로 하지 말고 양심적으로 일주일만 해준다면!”

“좋아! 그까짓 일주일 연극 한다고 내가 믿는 사람들이 바뀔 리 없지! 하자고!”     


그렇게 딸 승주와 약속한 승주 엄마는 승주가 도와달라고 호소해서 동원한 엄마 친구 아주머니들 3명과 연극을 하기로 했다. 곗돈을 횡령해서 그 교회에 헌금한 거를 받아내려고 계속 그 교회로 가서 승주 엄마를 닦달하는 내용으로 시험을 해보기로. 딱 일주일만 해서 그들이 불리하거나 시끄러워진다고 돌변하여 승주 엄마를 외면한다면 그 교회를 나가는 건 다시 생각하기로! 아무 변함없이 계속 보호해주고 행여 대신 빚이라도 갚아 주겠다면... 승주 엄마의 결심대로 계속 나가는 걸 승주도 말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승주야... 아무래도 내가 잘못 믿은 거 같다”

“잘 판단했어! 엄마, 이제라도 엄마가 제대로 보고 발을 끊기로 한다면 정말 고마워!”

“그 사람들이 자기들 불리할까 봐 당분간 나오지 말라고 한 말도 서운하지만... 뉴스에서 본 가정이 망가지는 화면을 보니 맘이 정말 안 편했어...”

“예전에도 그런 뉴스는 가끔 나왔는데 엄마는 아예 안 보려고 했었어! 이제는 보여?”

“그때는 뭔가 뉴스가 가짜이거나 내가 다니는 곳과는 다른 교회일 거라고 외면했지, 근데... 이번에는 좀 다시 보여”     


승주는 속으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를 몇 번이나 불렀다. 이 방법은 승주가 그냥 속이라도 풀려고 하는 말에 그 할아버지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딱 일주일만 짜고 시험해 보면 잘못된 교회는 속셈을 드러내게 된다며 한번 해보라고. 이런저런 온갖 설득과 협박에도 끄덕 안 하는 엄마 때문에 좌절한 승주에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시도해 보라고 했다. 계속 속수무책 방치하다가는 언젠가는 엄마와 원수가 되고 일상적 살림도 유지  할 수 없는 최악의 순간이 올 것 같아 낙심하던 승주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 계획을 시도한 것이었다. 엄마와 단단히 담판을 지었고 약속받은 후에. 승주 엄마의 친구들은 오랫동안 보아온 승주를 위해, 또 승주에게 자세한 고민을 듣고 친구 하나 살리는 셈 치고 흔쾌히 같이 움직여주기로 동의했다. 친구도 구하고 승주의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기에.    

 

#4...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잘 해결된 거야? 엄마 일이?”

“예! 엄마 친구분들이 도와주셔서 일주일 다 채우기도 전에요!”

“잘 되었구나~”

“엄마가 제 자리로 돌아와 주신 게 무엇보다 기뻐요! 모두 할아버지 덕분입니다!”

“내가 뭘~ 처자의 진심이 사람들을 움직인 결과지! 허허허!”

“이건 제가 할아버지에게 감사의 표시로 드리려고 직접 만든 김밥이예요!”

“에구, 이런 거 대접받을 생각 안 했는데!”

“그리고 이 따뜻한 어묵이랑 국물도 드시면서 잡수세요!”

“음! 진짜 맛있네! 처자는 나중에 음식점 차려도 성공하겠어! 흐흐”     


승주는 감사의 보답을 뭘로 할까 생각하다가 도시락을 준비했다. 날이 점점 쌀쌀해지는 가을이라 따뜻한 어묵도 준비하고! 돈으로 드릴까 생각도 했지만 어쩐지 그러면 이 고마운 마음이 오래 가지 못하고 당당한 듯 잊혀질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은 나중에 또 다른 큰 결과로 돌아왔다. 미처 기대도 안 한 고마운 결과로!     


“누나! 나 면접 보고 왔어!”

“목소리가 밝네? 잘 본 것 같네~”

“아니, 그런데 결과와 상관없이 마음이 너무 편하고 의욕이 넘쳐!”

“어쩐 일이래? 면접만 보고 오는 날은 세상이 무너지고 슬픈 사람이 되더니...”

“다 누나 덕분이야! 누나가 말해준 대로 했더니 올가미에서 벗어 났어!”

“내가 뭘 해줬다고...”

“누나가 말한 비법! 그거 하고 나니 마치 무슨 마법에서 풀려 난 심정이야!”

“그렇다면 기쁜 일이네! 축하해~”

“사실 내 번호 부르는 소리에 면접실로 들어갈 때는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소 같았어”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그때 누나가 해준 말이 생각났어! 준비해간 면접 대사가 기억 안 나거나 도저히 이걸로는 좋은 점수를 못 받을 낭패감이 몰려오면... 하라던 최후의 비결! B플랜!”

“진짜로 그걸 써먹었다구?”

“그럼! 내 앞에서 다른 사람들 하는 거 보니 기가 죽는 거야. 스펙도 그렇고 자료 준비도 많이 하고 정보도 많고, 조리 있게 자기 소신을 발표하는 걸 보면서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면접용 멘트 다 접어버리고, 내 처지와 내가 살고 싶은 꿈, 솔직한 바람! 그냥 붙고 떨어지고 상관없이 원 없이 하고 싶은 말 하고 나오라던 누나의 마지막 비법을 떠올렸지!”

“잘했어! 실력이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기라도 펴고 살아야지? 다음 날도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하고 나오는데... 솔직히 면접은 날아갔고 취직도 멀어졌다 싶은데, 오히려 길을 걸으면서 뭐든지 해봐야지 하는 의욕이 넘쳐나는 거야! 전에는 눈에 안 들어오던 일할 곳도 사방에 보이고! 세상에 시험 떨어지고 이렇게 밝은 기분이 든 거 이상할 정도야!”

“그래 다른 거 또 시도해 보면 되는 거지 뭐! 내 동생 철들어가네~”

“그래서 우선 카페 알바라도 시작할 거야! 그놈의 대졸자가 어떻게… 라며 자존심이 못하게 막던 많은 일이 다 가능한 직장으로 보여! 신기하지? 아침 시간에 일할만한 곳도 추가로 구하고 새벽반 외국어 학원도 다닐 거야! 내 비용은 내가 벌어서 할거니까 누나는 염려하지마! 하하하~”     


예상대로 남동생은 그 면접 본 회사에서 낙방했다. 그러나 동생 정수는 기죽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바쁘게 두 가지 돈을 벌면서 하고 싶었던 외국어도 배우고 자기 장기 계획을 세웠다. 당장 큰일 날 것처럼 늘 불안하며 아무 일도 못 하던 동생은 딴 사람처럼 변했다. 그 대학 졸업자라는 자기 멍에를 밀어 치우고 무슨 일이라도 할 자신이 생기면서 그랬다. 미래에 대한 걱정,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자기 자존심의 허깨비를 벗어 던진 것이 대견하고 신기했다. 아마도 시험 노이로제와 남의 눈에 맞추기만 급급하던 면접을 날려 버리며 자기 이야기를 면접관에게 자신 있게 하고 난 대가로 얻은 자유? 해방감 같은 결과였다!     


사실 승주는 이 놀라운 비법을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었다. 김밥과 어묵을 보온통에 담아서 할아버지에게 감사의 대접을 하던 날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이었다. 그저 얻어먹으면 살과 피로 안 간다며 기어이 또 무슨 고민거리 있으면 말해보라는 재촉에 털어놓은 결과였다.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동생이 돈을 많이 버는 큰 직장을 가는 게 소원이 아니고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동생에게 이 방법을 말해주라며 알려주셨다. 면접 때 앞뒤가 막히고 캄캄해지면... 솔직한 자기 수준을 아예 털어놓는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라고! 당연히 붙을지 떨어질지 염려는 접어버리고 최후변론 같은 심정으로! 그래야 길이 열린다는 할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동생에게 그대로 해주었다. 동생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담아서.     


그리고 그날 받은 보너스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 더 있었다. 삼세번의 축복이 우리나라의 전통이라면서 더 주신 비책. 막내 동생 연주에 대한 고민이었다. 올해 수능시험과 대학 진학을 앞둔 연주는 한 해 먼저 대학을 간 좋아하는 선배 오빠 문제로 점점 집중이 안 되어 점수 관리가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그 한 해 선배 오빠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수시로 연주를 만나고 싶어 했고, 연주는 낮 밤을 몰입하는 다른 수능 준비 친구들과 달리 주말이면 간혹 공부를 미루고 오빠를 만나야 했다. 어쩌면 안 만나면 오빠와 멀어지고 다른 사람과 만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연주는 공부만 매달리지 못했다. 곁에서 알게 모르게 지켜보는 승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태우던 중이었다. 오빠와 헤어지고 공부만 하라고는 못 하겠고, 그렇다고 수시로 만나며 둘 사이를 유지하라고도 못 하는 난감한 처지였다.    

 

“광수야! 내가 하는 말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줘!”

“예! 말하세요.”

“나 너랑 연주 고등학생 때부터 만나고 좋아하는 사이로 지낸 거 알잖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다는 것도 알아.”

“예! 저 연주 좋아해요! 예전부터 계속 변함없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연주랑 잠시만 좋아하고 너 데이트 상대로 지내다가 끝낼 생각이니? 아님 오래 나중까지 서로 잘되기를 바라며 만날 거니?”

“그거야... 당연히 오래 같이 보며 지내고 싶어요”

“그럼 올해 연주에게 무척 중요한 시기잖아? 너도 알다시피...”

“그렇지요. 연주도 원하는 대학 가려고 많이 애쓰고 있잖아요. 그런대요?”

“그런데... 연주가 너랑 행여나 멀어질까 봐 걱정이 되나 봐. 그래서 니가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시간을 내고 주말에는 하루를 보내기도 하잖아, 그게 공부 관리가 잘 안되는 이유가 되어 고민하는 거 같아...”

“그랬어요? 그건 몰랐는데...”

“니가 지금만 만나고 나중 생각을 안 한다면 뭐 니 기분대로 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좀 다른 방법을 택했으면 좋겠어!”

“어떻게요?”

“니가 연주가 불안하지 않으면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안심시켜주고, 물론 거짓말로 아니고 진심으로! 잘 넘겨서 더 기쁜 마음으로 좋은 상태로 오래오래 만나는 쪽을 선택했으면 싶어서!”

“당연하지요.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눈치도 못 채었고... 걱정마세요! 저도 연주가 잘 준비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어요.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제가 연주에게 말해줄게요!”

“고마워!”

“감사는 제가 해야지요? 누나가 말해주지 않았으며 미처 몰랐을테니...”     


그렇게 광수는 연주를 안심시켜주고 자주 만나지 못해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연주가 지금은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광수가 말해줄지 모른다. 언니가 세심하게 방법을 제안해준 덕에 우리가 좋은 관계로 오래 만날 수 있었다고! 모두가 할아버지의 고마운 해결책이었다.          


#5…     


‘이제는 안 나오시나보다...’     

이후로 승주는 몇 번이나 그 공원 벤취로 나가서 오래 앉아 기다려 보았지만 할아버지는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동네 분들에게 혹시 여기 자리 펴고 일하시던 할아버지를 다른 곳에서 못 보았냐고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는 그 공원에 그런 할아버지가 나와 있었냐고? 도로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승주도 그전에는 본 기억이 없었다. 승주가 그 공원을 통해 다닌 많은 날들 중에 단 한 번도... 벤취에서 일어서려는데 승주의 발아래 떨어진 종이가 보였다. 치워주려고 집어든 종이는 어느 교회에서 나눠 준 전도지였다. 무심코 펴서 본 가운데 페이지에는 이 글이 있었다.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됐을 때 나를 맞아들였다.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 주었다.

그때 의인들이 대답할 것이다. '주여, 언제 주께서 배고프신 것을 보고 우리가 먹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께서 목마르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맞아들였으며 언제 주께서 헐벗으신 것을 보고 우리가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우리가 찾아갔습니까?'

왕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마태복음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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