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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으로 김재식 Nov 09. 2022

이야기 하나 - 크리스마스 아이의 부전자전


1화 크리스마스 아이의 부전자전       


                            

#1...     


아버지는 도박장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딸을 팔았다. 말순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 집안은 시끄러웠고 살림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마치 전쟁 통에 피난 가기 직전 짐을 꾸리는 집처럼.     


“야가 니 딸이여?”

“맞아유! 데려가슈”

“여기, 지장 찍어! 나중에 딴말하면 죽여버린다”     

말순이 아버지는 방귀를 끼고도 자기가 성질내는 사람처럼 골이 나서 씩씩거리며 깡패같이 생긴 우락부락한 사람이 내민 종이에 지장을 쿡! 찍고 담배 연기를 뿍뿍 내뿜으며 어디론가 내빼버렸다.     

“아이구... 어쩐다냐? 말순아! 이 일을 어쩐다냐!”

“할머니! 무신 일이여? 이 사람들은 누구고?”

“니 애비가 노름하며 빌린 돈을 못 갚아 돈 받으러 왔다잖냐”

“근데... 왜 살림을 다 부수고 아버지는 어디를 가는 거야?”

“그게... 니 애비가 빌린 돈 대신 널 저 도박장 사장집에 식모로 넘긴대!”

“그게...무신 소리여?”

“안 그럼 니 애비를 잡아다 뱃사람들에게 팔아버린다니까 대신 널...”     


길게 이야기를 안 들어도 짐작이 갔다. 벌써 몇 번이나 집으로 들이닥친 험상궂은 사람들이 빚 독촉을 하는 것을 본 적 있는 말순이는 기가 차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도망가도 잡힐 것 같고, 또 안 잡혀도 아버지가 치도곤 겪을 일도 맘에 걸렸다.     


이제 겨우 열다섯, 그렇게 도박장 사장 집에 식모로 끌려간 말순이는 주인집 식구들이 시키는 대로 온갖 일을 해야 했다. 설거지 집안일 청소 도박장 심부름까지 그저 이름을 부르면 달려가고 시키면 소처럼 종처럼... 그렇게 보낸 3년은 십 년 같고 지옥 같았다.     


“안되요! 참말로 이젠 안되는구만요!”

“이게 간뎅이가 부었나? 어디서 앙탈이여?”

“그게 아니라...”

“시끄럽고! 얼른 옷 벗고 이리와! 안 그럼 옷을 확 찢어버린다?”

“참말입니더. 나 때문이 아니라 도련님 때문에 안된단 말입니더”

“뭔 개소리여? 이제껏 고분고분 잘 듣더니? 맞아야 정신 차릴래?”

“사실은... 지가 성병에 걸렸다고, 낮에 병원 다녀왔는데... ”

“뭐야?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 들통나면 반쯤 죽는다?”

“저기... 약 봉지 봐요. 진짜라니까요. 절대 접촉하지 말라고...”

“뭐야? 이거... 진짜네? 에이! 더러워!”

“너...혹시 전에도 그런 거 아냐? 이거 큰일 났네, 나 옮긴 거 아녀?”     


도박장 사장의 아들은 약봉지와 병원 이름을 확인하더니 심한 욕을 남기고 쌩 나갔다. 마치 문둥병자 가까이서 멀리 가려는 사람처럼 얼른 문을 닫고 내뺐다. 말순이는 낮에 병원에서 들은 의사의 말이 계속 반복해서 기억났다. “성병입니다. 치료 제대로 받고 약 꼬박 먹으면 나을 수 있으니 사람 접촉 피하고 위생에 신경쓰세요!” 말순이는 서러움이 몰려와 눈물이 터졌다. 지난날들이 영화 화면처럼 흘러갔다.   

  

이 집에 들어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말순이 방을 쳐들어온 도박장 사장 주인아저씨 아들은 말순이를 겁탈했다. 소리 지르면 죽여버린다며 목을 짖눌렀다. 죽는 거도 겁 안 나고 소리도 칠 수 있었지만... 말순이는 이대로 쫓겨나고 집에서 다시 빚쟁이에게 시달릴 일도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야 당해도 싸지만 할머니가 맘에 걸렸다. 그리고 맨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면 돈 잃은 도박 화풀이로 두들겨 패는 아버지와 사는 것도 정말 지겨워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입을 깨물며 참고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그 뒤로 주인아저씨만 어딜 가거나 늦으면 수시로 방으로 쳐들어왔다. 심지어 밤에 불러내어 창고나 뒷마당에서 당하기도 부지기수였다. 더 힘든 것은 도박장 일하는 건달들에게 뭐라고 했는지 도박장에 음식이나 다른 전할 게 있어 심부름을 가면 그놈들도 돌아가며 겁탈을 했다. 미리 순번을 정했는지 지들끼리 자리를 피해주고 낄낄거렸다. 도박장을 죽기보다 가기 싫었지만 말순이는 달리 피할 방도가 없었다.     


“야! 말순이 너 이리로 와봐”

“예...”

“너 애기 들으니 병이 걸렸다면서? 그것도 성병이...”

“예...”

“애가 몸 관리를 잘하라고 했더니...에이, 참 골치가 아프네”

“....”

“너 그러다가 울 식구들에게 옮기면 큰일이니 그만 집 나가라!”

“아직 3년이라 2년 더 남았는데... 갚을 돈도 없구요”

“됐다! 그냥 갚은 걸로 해줄테니... 당장 보따리 싸서 너네 집으로 가든지 알아서 해라!”     


그래도 말순이를 조금은 측은하게 여겼는지 아니면 집안일 열심히 하는 말순이가 쓸모가 있다 생각했는지 도박장 사장인 주인아저씨는 잘 대해주었다. 그러나 결국 여기가 끝이었다. 식구들에게 옮길까 봐 하루아침에 집에서 추방이었다. 남은 기간을 감해준 것과 돈 조금을 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 말순이는 혼란스러웠다.   

  

#2...     


“야! 말순아!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몇 년 만이구나!”

“너 갑자기 학교 그만두고 사라져버려서 많이 보고 싶었어!”

“미안해... 연락을 남길 틈도 없이 가야 했어서”

“아냐! 너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는 거 나중에 들었어”

“사실은... 나 있던 집에서 나왔는데 집으로 돌아가긴 죽기보다 싫어”

“그렇겠다. 널 빚 대신에 팔아먹은 아버지랑 살고 싶겠니...에휴”

“그래서 혹시 너 자취방에 잠시만 지낼 수 없을까?”

“좁아서... 그래도 괜찮으면 가자!”

“고마워! 내가 지금 병원도 좀 다녀야 하고 어디 취직도 힘들어서...”     


그간의 사정과 병에 걸린 이야기를 들은 중학교 친구 점례는 딱한 사정을 거절하지 못하고 집에 받아주었다. 공장을 다니며 어렵게 사는 점례도 시골집은 멀어서 출퇴근이 힘들어 읍내에서 작은 자취방을 얻어 지내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돈을 벌어 시골집에 다 보내고 근근히 생활하는 점례는 세간살이도 없고 허리를 졸라매며 사는 생활이 우울한 중이었다. 그래서 한편 말순이가 같이 지내면 좀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2년 후)   

  

“쾅! 쾅! 쾅!”

“누구...세요?”

“빨리 문 열어보세요!”

“무슨 일인데요?”

“이 집 아가씨 ㅇㅇㅇ씨 맞지요?”

“그런대요. 맞는데... 왜 그래요?”

“오늘 새벽 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어요!”

“예? 뭐라구요? 그럴 리가...”     


병원을 가서 확인한 말순이는 다리가 풀렸다. 점례가 맞았다. 간밤에 집에 안 돌아와서 또 2차를 나가서 늦나 보다 했다. 자주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하고 혼자 밥을 먹고 잠들었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친구의 죽음을 맞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멍멍해져 있는 말순이에게 불행한 일은 또 들이닥치고 있었다. 집주인이 와서 방을 빨리 빼달라고 윽박질렀다. 아직 계약기간도 남았는데 왜 그러냐고 묻는 말순이에게 집주인은 천둥 같은 사실을 터뜨렸다. 이미 친구가 집 보증금을 미리 달라고 해서 다 내주고 집 비우기만 기다렸다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집주인이 내미는 돈 받은 영수증에는 분명 점례 이름과 집 비워주겠다는 약속이 쓰여져 있었다.     


“말순아! 너 소식 들었어?”

“무슨...”

“점례가 사기를 당해서 돈 다 털리고 속상해서 죽었다는...”

“그게 무슨 말이야? 사기라니?”

“왜 자주 만나던 그 웨이터 있잖아!”

“아! 그 사람, 알아 그런데 왜?”

“그 새끼가 결혼하자고 약속하고 사업자금으로 점례 돈 빌려 갔대”

“나도 곧 결혼할 거라는 말은 점례에게 들었어”

“그런데... 그 새끼가 돈만 받아먹고 날라버렸어!”

“그것도 점례가 처음도 아니었나봐! 전에도 그랬나봐...”

“어떻게 그런 일이...”

“나쁜 새끼! 벼룩이 간을 빼먹지! 그게 어떻게 번 돈인데...”

“돈도 돈이지만… 사랑의 배신에 더 상처를 받았을거야”     


점례의 물건을 챙기러 간 룸쌀롱에서 만난 동료의 말에 말순이는 머릿속이 하애졌다. 그제야 왜 집 보증금까지 미리 말도 없이 다 뺐는지 이해가 갔다. 물론 남자에게 빌려준 돈을 다시 돌려받거나 이사 가게 되면 분명 말하려고 했을 거다. 문제는 그러기 전에 남자 놈이 날라버린 걸 점례는 충격적으로 당한 거다. 2년 전 시골 읍내 자취방에서 서울로 가자는 점례를 따라 올라올 때 말순이는 곧 일자리를 구해 자립하려고 마음먹고 점례의 서울 상경에 동의했다. 그러나 사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방값은 너무 비쌌고 일자리는 쉽게 잡히지 않는데 걸린 일은 죄다 무슨 판매 수당을 받는 불안정한 일이었고 좋은 자리는 학력도 보증인도 없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생활비는 바닥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점례는 결국 야간 술집을 들어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곳은 다 그런 자리뿐이었다.     


“점례야, 나도 일자리가 잘 안 구해지고... 너 혼자 힘들게 버는 돈으로 살기가 미안해”

“곧 구해지겠지 뭐,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알아봐~”

“그래도 그냥 하루하루가 무서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일하는 곳에 다른 일은 없을까?

”술자리 들어가는 일은 너에게 권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뭐라도 해야하니까 한 번 물어봐!“

”그래, 물어볼게!“

”나 요리도 하고 살림도 해봤으니 그런 자리라도 있으면 할게!“     


시작은 잘 풀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점례 룸쌀롱에 주방일을 돕는 보조 자리가 비어서 사장이 데려오라고 했다. 그러나 늘 호사다마인 게 인생인 걸까? 손님은 늘어나는데 접대 아가씨가 부족해 전전긍긍하던 사장은 말순이에게 주방 보조일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손님이 몰리고 아가씨가 모자라자 부탁 반 협박 반으로 술자리 룸에 들어가기를 강요했다. 일을 그만두지 않으려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 번 두 번 술자리에 합석하는 횟수가 늘어나자 사장은 완전히 전업으로 하기를 권했다. 돈 수입이야 주방보조에 비하면 많았지만 말순이는 피하고 싶었다. 하루  걸러 2차라는 이름으로 나가게 되는 성매매는 하고 말고를 기분대로 선택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에 도박장 사장 주인집에서 겪었던 기억들이 아직도 끔찍하게 남아 있는 말순이에게 그런 성매매 일은 더 괴로운 것이라... 그렇게 들여놓은 일은 점점 빠져 나올 수 없었다. 마치 정해진 레일을 따라 코스를 타는 청룡 열차처럼 앞으로 앞으로 나가기만 해야 했다. 결국 어느 날 기다렸다는 듯 점례에게 닥친 불행은 언젠가는 말순이에게도 올 일이었을 거다.     


#3 ...     


”좀 더 힘을! 힘주세요!“

”아아아악! 끙끙“

”보여요! 아기 머리가! 조금만 더 힘을~“

”으으윽! 끙!“

”조금만! 한 번만 더요!“

”됐어요! 거의 다 나왔어요!“     


그렇게 힘든 경험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힘든 문을 통과하는지 말순이는 전혀 상상을 못 했던 일이었다. 올봄에만 해도 말순이는 죽기를 바라고 부디 너무 고통스럽지만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그런데 같은 해 거의 끝 무렵에 세상을 떠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한 생명을 이 세상에 데려다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기를 낳은 엄마도 그랬을 거라는 사실을 느끼자 말순이는 갑자기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자기를 세상에 던져놓고 일찍 돌아가신 엄마가 늘 원망스러웠는데... 자기를 임신하고 열 달이나 뱃속에서 잘 키워 이 고통의 순간을 겪었을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순씨!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래!“

”온 세상이 하얗게 눈에 덮혀서 보기는 좋네!“

”그러게! 얼마나 좋은 날 우리 아기가 태어나는지 기뻐!“

”고마워요! 용수씨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복을 어떻게 누리겠어...“

”무슨 소리야! 내가 더 고맙지! 늦은 노총각에게 예쁜 아내랑 아기도 생기고“

”용수씨는 아빠 되는 거 겁 안나?“

”신나지! 나 혼자 먹고살자고 돈 벌 때 비하면 얼마나 신나는데!“

”아들일까? 딸일까? 왜 안 가르쳐주지?“

”병원 규칙이 그렇다는데… 그까짓 거 무슨 상관이야? 난 다 좋아! 흐흐“     


말순이는 간밤에 남편이랑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평생 한 번도 기쁘다는 생각 없이 맞이하던 크리스마스이브를 처음 감동으로 맞이했다. 꿈인지 아닌지, 꿈이라면 제발 영원히 깨지 말고, 현실로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고 말순이는 속으로 빌었다. 이제야 맘 편히 가족이라는 행복을 느끼게 되었는데… 지난날 겪은 모든 불행과 고통, 그 고통을 준 누구에게도 복수하지 않고 다 잊어줄 테니 제발 이 행복만이라도 유지 시켜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그래서일까? 올봄, 겨울이 끝나가던 어느 날 밤의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랐다.     


”놔! 놓으란 말이야! 니가 뭔데 날 가자는 거야?“

”여기서 이러다간 위험해요! 얼어죽을 수도 있어요!“

”나 죽을 거야! 그것도 빨리 죽을 거야!“

”그래도... 눈에 보인 사람을 어떻게 외면하고 가요?“

”이 아저씨 웃기는 사람이네? 속셈이 뭐야? 크크크“

”아무 속셈 없어요. 그냥 정신을 좀 차리시라고요“

”남자 놈들 다 뻔하지! 내가 한두 번 당해본 거도 아니고!“

”집이 어디예요? 데려만 드릴게요!“

”집? 나 그런 거 없어! 다 날아갔어! 친구도 집 보증금도 다~“

”갈 데가 없어요? 아는 친척이나 친구도?“

”이 도시는 나에게는 무인도야!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흑흑!“     


그렇게 술에 취해 정신을 잃도록 소리 지르고 울다가..., 결국 말순이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잠을 깬 방은 낯선 곳이었다. 작지만 깨끗하고 이전 룸쌀롱 대기실처럼 술에 찌든 냄새도 안 나고 억지로 뿌린 향수의 역겨움도 없는...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기를 교대로 하는 몸에 좋은 방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간밤에 어떤 남자에게 소리소리 지르다 기억이 끊기고 그 이후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일어나시면 이밥이랑 국 먹고 약을 좀 먹어요. 속 달래는 약입니다.’     


메모지 한 장이 놓인 작은 사각 밥상에는 밥과 국이 단촐하게 있었다. 하얀 약봉지에는 마시는 드링크랑 포장지 알약이 담겨있었다. 말순이는 얼른 도망치고 싶었다. 얼굴도 화끈거리고 잘못하면 무슨 안 좋은 일이 또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함도 몰려왔다. 그러나 속은 더 요란하고 아픈 데다... 막상 나가면 갈 곳이 또 없는 처지가 떠올랐다. 마치 무인도와 무인도를 몰래 떠다니는 표류자 같았다. 옷가지만 간단히 가방에 챙긴 채 점례와 지내던 방을 나온 후 이틀은 거리에서 잠자고 공원 벤치에서 남은 돈으로 산 빵으로 때웠다. 점례와 같이 일하던 곳에는 도저히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곳곳에 같이 있던 자리와 시간대마다 점례가 기억나고 그걸 떠올리며 일한다는 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일어나셨어요? 속은 좀 나아졌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아뇨! 사실은 낮 동안에 나가버리지는 않으셨을까 종일 걱정했어요! 하하!“

”그럴까 생각도 했는데... 그건 도무지 싸가지 없는 일이고 미안해서“

”인사만 하고 가시려고요? 오늘 이미 늦었는데 저녁먹고 자고 내일 가세요!“

”어제는 많이 미안했어요. 욕도 심하게 해서...“

”다 기억나세요? 나중에 집은 끝내 안 알려주셔서...여기 제 집으로 왔어요!“

”..... 다 기억은 안 나요“

”지금이 한겨울은 막 지났지만... 술 먹고 취한 채 길에서 잠들면 동사 위험이 있어서요“

”다시는 안 그러고 싶어요...“

”사람마다 다 힘든 사정이 있는데... 그거 나무라는 거 아닙니다! 다만... 위험하지만 않게“

”그러게요. 남에게 심한 걱정을 끼쳐드렸네요“     


하루만, 하루만 더, 그러다가 말순이는 결국은 길게 머무르게 되었다. 용수는 열심히 일을 다니며 돈을 벌어 왔고 말순이는 다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느라 용수의 집에서 가벼운 살림을 해내면서 지냈다. 그런데... 두어달이 지날 무렵 말순이는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한 번도 용수씨와 잠자리는 한 적이 없는데... 임신이라면? 이전 룸쌀롱에서 나가던 2차 성매매의 남자들이 눈앞에 있는 듯 스쳐 지나갔다. 이건 도저히 못 감출 일이고 착한 용수씨에게 상처를 줄 일이었다.     


”저... 이제 일자리를 구해서 나가야겠어요“

”예? 그게 무슨... 갑자기 왜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아뇨! 그래서가 아니고... 벌써 두어 달인데 염치가 없지요“

”그러지 마세요. 저를 생각해주신다면 그런 말만 제발...“

”....... 미안해요“

”왜 그러는데요? 누가 오래요?“

”아뇨, 사실 정해진 갈 곳은 없어요“ 

”그런데 왜 굳이 나가시겠다고 해요? 다시 생각해봐요“    

 

더 이상 감추고 에둘러 말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마음을 아프게 해줄 수 없었다. 차라리 적당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거 없는 게 아쉬웠다. 거짓말도 능사가 아니고 체질도 아닌 말순이에게는 그랬다. 결국 사실을 털어놓아야만 했다. 용수는 처음에는 꽤 충격을 받은 거 같았다. 실망과 혼란의 그늘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위장에는 서투른 사람들이었다. 룸쌀롱 다닌 이력이랑 임신을 한 사실이 아마도 용수에게는 여러 상상을 하도록 했을 거고,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오는 통 큰 남자나 쿨하다는 남자들처럼 하하하! 하며 웃을 수는 없었다. 어떤 남자가 그런 전력과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을지 모르는 이 상황에 쿨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고민의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마음을 정한 용수는 단단한 결심처럼 말순이를 붙잡았다. 집을 나가는 걸 허락할 수 없다는 듯 확신을 주며 붙잡는 용수에게 말순이는 조금은 편해진 상태로 붙잡혔다. 다른 선택의 길은 모두 손바닥을 보듯 뻔한 거칠고 위험한 행군이 기다리는 것을 빤히 알기 때문에.     


#4...     


”빨리 좀 오셔야겠어요!“

”어머니가 많이 아프신가요? 얼른 가겠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이틀을 못 넘기실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도 뛰고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는 심정으로 지산이는 초조했다. 자주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고 여유가 없었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어머니가 그립고 안타까웠지만 지산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늘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어디 계신 가요?“

”이쪽으로 오세요!“

”어머니! 저 왔어요!“

”...오느라 고단했지? 미안하다 고생시켜서“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제가 미안하지요.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해서...“

”아니야! 넌 언제나 잘해왔어! 고맙다“

”힘내세요!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을겁니다“

”아니야. 나도 알아 이제는 너희 아버지를 만나러 갈 거라는 걸“

”......“

”지산아! 너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아라!“

”전혀 그런 생각 안 해요. 걱정은 마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거나 이 말 저 말 해도 너의 아버지는 한 분이다“

”알아요. 저를 키워주신 아버지는 한 분이지요. 엄마의 사랑 용수씨!“

”그래, 고맙다 그렇게 인정해주니...“

”그러니 힘내셔서 잘 이겨내야지요!“

”아들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말씀하세요! 힘드시니 천천히...“

”네가 누구의 아들인지, 누가 네 아버지인지는 너에게 달렸다“

”예!“

”네가 어떻게 사는지 너를 보면 너 아버지가 누구인지 다들 안단다“

”아버지는 너무 훌륭하신 분이라 제가 닮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럼! 이미 너도 많이 닮았는 걸! 너를 보면 그 분이 보여“

”어머니에게 하도 많이 들어서 맘에 새겨졌어요!“

”너와 나, 우리 가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어“

”예! 저도 그렇게 닮도록 살게요. 염려마세요!“     


그렇게 어머니는 오랜 암투병 끝에 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지산이와 이별했다. 지산이를 낳고 열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늘 일하시던 곳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다. 작고 가난한 회사라 보상금도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팔을 걷어 올리고 지산이를 키우며 가정을 이끄셨다. 순전히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의 힘과 추억으로 한 번도 생을 원망하거나 후회도 하지 않으셨다. 늘 밝고 행운의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다! 너 아버지를 만나 행복을 누리고 산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라고 입에 달고 사셨다. 그래도 그 이전에 고단했던 세월의 후유증이었을까? 지산이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어머니 말순이는 암에 걸려 긴 투병의 일상을 살아야 했다.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지산은 돈을 좀 더 받는 외국으로 자원을 해서 근무했다. 그렇게 또 십 년이 흘렀고 말순이는 남편 용수씨를 만나러 하늘로 떠났다.     


장례를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지산은 집의 짐을 정리하다가 다락에 먼지를 뒤집어 쓴 작은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거의 이십 년 만에 열어 본 작은 상자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잡다한 몇 가지 기념품들과 서너 권의 공책 일기장이 있었다. 어머니와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이 끼어 있었고 볼펜의 잉크가 오래되어 약간 번지고 흐려진 글이 눈에 들 왔다.     


‘00년 0월 0일’     

길에서 천사를 보았다. 술에 취해 떨면서 울고 있는 천사...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를 부르며 정신이 반쯤은 나가버린 딱한 상태로. 도저히 놔두고 발을 돌릴 수 없어 집으로 데려왔다. 뭐가 그리 아픈 사연이 있어서 이 추운 날 길에서 그렇게 울었을까? 안되어 보인다...    

 

‘00년 0월 0일’     

다행이다! 집을 안 나가고 머물러 있어 준 날개가 다친 천사~ 내가 뭘 도울 수는 없을까? 내일은 나간다는 데... 어디 갈 곳은 있는지, 몸은 견딜 수 있는지 걱정스럽다. 그냥 여기 머물러도 되는데... 이상하게 볼까 봐 말을 못 꺼내겠다.  

   

‘00년 0월 0일’     

그랬구나... 그렇게 슬픈 일이 있었구나... 맘이 얼마나 아팠을까? 부모에게 버림받고 온갖 험한 고생 끝에 친구도 잃고 길로 내몰린 그 심정은. 내가 도울 수 있는 자리를 조금만 내어주면 좋겠다. 혼자 살아가는 그 길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아는 내게 이것은 우연일까? 아님 인연일까?     


‘00년 0월 0일’     

혼자 감당하는 지난날 악몽이 너무 깊었나 보다. 사랑 없이 벌어진 성폭행의 기억들이 뱀처럼 가슴속에 웅크려 괴롭혀왔나 보다. 남자를 경계하고 미워하며 사는 동안 버티던 둑이 더는 감당을 할 수 없었나 보다. 요즘 수시로 몰려오는 우울증을 이기느라 나 없는 낮에 술을 입에 대는 것 같았지만 아는 척을 안 했다. 그런데 오늘은 말순씨가 다른 날과 달리 좀 많이 취했고 나를 안겠다고 품으로 달려들었다. 진짜 사랑이 담긴 몸 사랑을 받고 싶다며... 진짜 사랑을 담고 말순씨와 관계를 가졌다. 너무 고맙고 따뜻하고 평생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00년 0월 0일‘     

말순씨가 어제 밤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못할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몸으로 나누는 사랑에 대해 심한 혐오를 표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을 말해야 하나? 모른 척 대해야 하나? 어떻게 하는 것이 말순씨에게 맘이 편할지 잘 판단이 안 된다.     


’00년 0월 0일‘     

말순씨가 임신을 했다고 털어놓는다. 많이 고민하다가 말하나 보다. 처음에는 아무 예상 없이 듣다가 좀 충격을 받았다. 이전 직업상 가졌던 남자들이 먼저 떠올랐다. 누구의 아이일지 모른다는 괴로움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런데... 기억났다. 딱 한 번 말순씨와 가진 잠자리가! 두어 달 전 딱 한 번의 관계. 말순씨는  그날 너무 술 취해 나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 걸로 안다. 나도 말하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다. 말순씨가 엄청 혼란스럽고 미안해한다. 그 후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었기에 더 그럴 거다. 내 결심은 끝났다. 뭐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아니, 굳이 알 필요가 없다. 나는 책임질 일을 했고 책임질 마음이 충분하다. 굳이 날짜를 세어보거나 유전자 확인이나 그런 거 할 필요 없다. 말순씨를 붙잡았다. 언젠가는 우리가 가진 잠자리를 말해주겠지만 그런 걸로 우리가 서로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너무 기쁜 날 너무 큰 선물을 받으면서 ‘혹시?... 그게 아니면?’ 그따위 일말의 부끄러운 의심은 우리 둘 다 안 가질 것이다.     

 

#5…     


지산은 일기장을 덮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확신은 아무 의혹도 주저함도 허락하지 않았다. 두 분이 서로에게 가진 믿음과 포용은 지산의 출생을 전혀 부끄럽게 하지 않는 든든함을 주었다. 다만 어머니가 유언처럼 남기신 말은 앞으로 평생 지고 갈 숙제가 되었다. 내가 누구며 누가 내 아버지가 될지는 내게 달렸고, 내가 사는 모습으로 사람들이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인정하게 될 거라는 그 말씀이...‘ 다시 맞이하는 성탄절에 혼자 생일을 보내야 하는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이날 세상에 나를 낳아 주신 두 분께 감사를 올리며 자기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외롭지 않다고 다짐했다.     


[요한복음 14:8-14 -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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