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기억 66 - '아름다운 사람'

아픈 가족과 살며 생기는 반짝이는 파편들

by 희망으로 김재식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고 추웠다,

비가 바깥에 내리는 눈물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날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것 같은 형편 속에서 날마다 하루씩 살아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욕심 속에서 날마다 죽어간다.


"안정숙씨! 채혈 좀 하겠어요."

"예? 아까 해갔는데 또 해요?"


그렇게 잠에 빠질 만하면 깨워서 채혈, 다시 잘만 하면 또 깨워서 채혈, 새벽부터 채혈공세가 심했다. 간밤부터 금식해서 배고픈 집사람에게서 세 번씩이나 채혈해 갔다. “에이, 피 팔아먹는 병원 아냐?” 옆사람들이 농담조로 투덜거렸다.


창밖에는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랑의매’라는 핑계를 대고도 회초리 한번 때린 적 없었고 한 번도 모진 소리 한 적 없이 사랑으로 키운 딸아이. 그 딸아이도 긴 헤어짐에는 결국 무게를 못 견디고 울어서 나를 힘들게 했다. 아내도 자기 몸 하나 버티는 걸 숨기지 못해 괴로워한다. 하기는 멀쩡한 나도 나를 감당 못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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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말이 없다 / 참아라! 하지도 않고 / 못난 사람! 하지도 않고 / 그저 내려와 파편이 될 뿐 / 나도 대꾸도 하소연도 없이 바라만 본다. /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슬쩍 창밖을 힐끔거리며 / 아내에게 밥도 먹이고 세수도 시키고 / 무심한 척 무표정으로,

병원 뒤 산책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 몸속에 갇혀있던 눈물을 / 비처럼 음악처럼 조금씩 몸 밖으로 내보낸다. / 쇼생크탈출 영화에서 / 흙무더기를 바지 단에 넣어서 / 운동장에 조금씩 버리던 죄수들처럼, / 빗물과 눈물은 섞이고, / 아무도 모른다 /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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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세상 속을 걸어가는 순례자는 날마다 죽는 순교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다시 살아난다. 그래야 한다. 죽는 것만이 순교가 아니다. 죽고 부활해야 진짜 순교다.


아름다운 사람 – 가는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고도 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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