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예수 5 - ‘복’이라 쓰고 ‘고난’이라 읽는다

by 희망으로 김재식


‘복’

많은 사람들이 수 천년 동안이나 그만두지 않고 빌고 빌어온 말이다. 온갖 꿈들이 그려지고, 전쟁조차도 복을 구하기 위해 일어나기도하고, 어쩌면 문학과 예술과 종교도 상당부분 이 복을 구하기 위해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넌 축복받은 여자야!”

세례요한의 어미가 될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그렇게 말했다.

과연 마리아에게 온 복은 무엇일까? 그건 흔하게 사람들이 꿈꾸고 기대하는 복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그건 ‘복’이라고 쓰고는 ‘고난’이라고 읽어야 더 어울릴 단어였다.

약혼한 여자가 동침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다면? 지금의 시대야 흉은 쥐꼬리만 해졌고, 더구나 돌 맞아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2천 년 전이라면 좀 달라진다. 돌 맞아 죽을 뿐 아니라 살아 버틴다는 게 지옥 같아 질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마리아에게 일어났다. 신앙과 순종이라는 마리아의 결심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건 마리아 혼자의 결심일 뿐 세상은 허용하지 않는 불행일 뿐인 사건이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자청했을까? 엘리사벳마저도 그 일을 축복이라고 말했을까? 그들이 가진 복의 기준은 왜 다를까?

우리는 복에 따라오는 모든 기쁨과 호사를 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원한다. 그런 입장에서 복은 분명 많아지고 높아지고 앞서가는 것들을 말한다. 이기적이고 상대적이고 때론 남을 누르고 남에게서 빼앗으면서도 이루어지기도 하는,

우리는 분명 알게 모르게 그런 복에 매달린다. 신앙인이고 비신앙인이고 구분 없을 정도로, 심지어는 교회가 앞서서 그것을 목표로 주장하고 그것을 보장하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한다. 때론 기도와 봉사와 헌금을 조건처럼 내세우기도 하면서, 어찌 보면 앞에 있는 신이 하나님이든 바위나 고목나무든 부처든 상관없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놀라운 일이다. 신의 성격과 맞는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일텐데도 내용을 그대로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기도라니...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복이라고 말한 그 수혜자가 자신들이 아니었다. “한명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한 명은 그의 선지자지!“라고 엘리사벳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축복을 받았다고 마리아에게 말하니까.

그 복이라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선지자는 어떻게 되었나, 둘 다 죽임을 당했다. 한명은 십자가에, 한명은 목이 잘려 쟁반에 놓이는 타살을, 그 어미들의 울음과 통곡은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런데도 그들은 그 운명을 복이라고 말하고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왜? 그들의 삶이 자신에게로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 게 아니고 남들에게로, 어려운 사람들과 고통중의 세상에게로 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영광은 오로지 하늘로 가기를 바랬고...

그러나 불안하다. 그런 복을 바란다고 주위에서, 세상이 호락호락 동의해줄까?




“하지만 그가 내 말을 믿을까요?”

요셉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 어미와 그 마을의 이웃들, 또 나중에 전해 듣고, 남의 말 하기 좋아할 사람들과, 자기 해석을 위주로 심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릴 종교인들... 엘리사벳이 그 두려움을 가진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실 거야!”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세상이 어디든 변하지 않는 가능성,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셔야 가능한 일, 진정한 복을 추구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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