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예수 14. - 첫 복음 선포에 날아온 돌

by 희망으로 김재식


“아들이 돌아왔어요! 예배당에 있어요!”

마을 사람들이 마리아에게 달려와 소식을 알려주었다. 세례요한에게 합당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는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고향은 평범한 귀향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요셉의 아들이잖아?”

예배당에서 두루마기 성서를 읽기 위해 단에 올라선 예수에게 마을 남자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려진 칸막이 뒤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마리아는 예수의 한마디 한마디에 온 몸의 전율을 느꼈다. 왜 이렇게 같은 예수를 두고 맞이하는 사람에 따라 불편함과 경이로움으로 정반대가 되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혈연가족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니었다.


“상심한 자를 위로하고, 묶인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빛을...”

진리와 구원의 약속은 아득히 높은 곳에 영원히 있으라는 굳은 태도를 가진 사람과, 한시라도 빨리, 꼭 이루어져야 한다며 메시아를 눈물겹게 기다리는 사람의 차이가 있었다. 두루마기를 말아 놓고 ‘오늘 이 말을 들음으로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예수의 말은 아주 오랫동안 같이 이 예배당에 모였던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어떻게 같은 개천에서 놀고, 같은 미꾸라지인줄 알았던 목수의 아들이 메시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걸 믿으라구? 그럼 졸지에 자신들은 천길 바닥으로 떨어진 엑스트라가 되어 버린다는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달랐다. ‘오늘 예언이 이루어졌도다!’ 감동하며 눈물지었다. 약혼하고 임신을 하여 돌 맞아 죽게 생겼던 위기와, 사랑하는 약혼자 요셉으로부터 ‘그걸 믿으란 말이요?’라며 괴로운 얼굴을 보아야 했던 시절도 생각이 났다. 아이를 잃어버린 줄 알고 철렁했다가 성전에서 만났을 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을줄 몰랐던가요?’라는 어린 예수의 충격의 말도 기억이 났다. 이제 그런 예수가 긴 준비를 마치고 돌아와 태어난 고향에서 메시아 삶을 시작하겠다는 공적인 선언을 하는 모습을 보니 오랜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야? 네가 세례요한이냐? 성전에서 나가!”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을 하며 험악해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예수는 랍비에게 말했다.


‘선지자도 고향에서는 푸대접을 받았소!“

“날 부끄러워 않는 자는 복되도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무리들은 예수를 예배당에서 몰아내었다.

“꺼져! 다시는 이스라엘에 발도 들여 놓지마!”

“돌로 쳐죽이자!”

그랬다. 어디나, 언제나,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에게 결코 추월당하거나 더 잘되는 꼴은 눈뜨고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정치나 군대에서만 통하는 힘의 논리가 아니고 종교집단과 성전에서조차 당연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곳도 바깥과 똑같은 사람의 본성이 설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서도 처음 배우고 익힌 사람은 동종업계에서 몇 번 이나자리를 옮겨야 제 대접을 받고 승진을 할 수 있다. 기술계통은 유난히도 그런 관습이 심하다. 왜 자기 무리에서 처음 배우고 익힌 사람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대로 월급도 더 올려주고 직급도 올려주면 안되는 걸까? 아마도 같은 수준의 동료들이 가장 불편해지기 때문일거다. 어제까지 같은 급으로 놀다가 오늘부터 올려 부르고 예의를 차린다는 거 참 힘들 거다. 어색하고...

오죽하면 생사가 달린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일에서조차 내려 보고 무시하는 결국에 이르렀다. 하늘의 구원보다 사람들끼리의 우열과 시샘, 내가 더 인정받기를 경쟁하는 풍조는 예수의 고향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2 천 년 전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땅의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도 횡횡 하니까...

(첫 복음 선포에 돌아온 돌맹이, 그곳은 고향이었다. 혹시 지금 우리의 신앙은 예수에게 돌 던지는 꼴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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