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예수 16 - 그가 기뻐하셨다

by 희망으로 김재식



“여기 사람들은 사느라 여념이 없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요.”

그렇구나. 사람은 살기만도 바쁠 수 있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애를 써도 다 살지를 못하고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구나. 여념이 없다라니... 갈릴리 바닷가의 사람들이 그랬다. 태어나면 계속 멈출 수가 없는 생존의 쳇바퀴. 하기는 그게 어디 갈릴리 마을만 해당되던가? 2천 년이 지난 한국 땅 구석구석 낮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다. 남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현대판 종살이 같은 월급쟁이들이 그렇고, 돈 몇 푼에 사람목숨 걱정은 뒷전이고 부패와 자리 지킬 욕심에만 전전하는 사이 바다에 침몰되어 죽어가는 아이들도 그렇고...



“...하지만 삶에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척박하고 고단한 바닷가에서 태어나 밥 먹고 일하고, 일하고 밥 먹고, 공부라고는 둘에다 둘 더하는 셈법이나 배우고 살던 한 청년이 예수에게 말했다. 여념이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와중에 생각할 여유를 가지고 살다니! 누군가가 그랬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그걸 뿌리치고 세상 모두가 한 방향으로 떠내려가는 어리석음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나보다.

“오늘 선생님의 설교를 듣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렇다 설교는 죽어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돌려주는 일이라야 한다. 더 배워서 더 똑똑하라는 일도 아니고, 가진 것을 다 털어서 더 높은 건물을 올리는 만족감으로 혹 살아가며 생기는 고통을 적당히 덮으라는 마취의 용도가 아니다. 끝없이 흘러가는 넓은 물길에서 거슬러 오르는 좁은 물길을 기꺼이 결단하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 옛 경전이 살아났어요!

“우린 주가 마음속에 있기를 원해요. 돌에 새겨지지 보다요.”


그 말을 듣는 동안 예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왜 안 그럴까? 나라도 그런 고백을 듣게 된다면 심히 기쁘고 맥박이 빨라질 것이다. 얼마나 간절히 알기를 바라며 한 설교인데 고스란히 받아 들였다. 그리고 자기의 고백으로 다시 내어 놓는다. 설교자에게 가장 최고의 답례가 되었다. 모든 설교자가 경험하고 싶은 모습으로! 그런데 모든 설교자에게 이런 고백을 듣는 순간이 오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그건 모든 설교자가 그런 진심으로 설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이 뭔가?”

“세배대의 아들 요한입니다”

예수는 그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를 주었다. 그것은 부탁일까? 아님 명령일까. 그의 일생이 온통 거슬러 오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나를 따르라!”

그렇게 말하는 그가 기뻐하셨다! 얼굴과 마음 가득히~



(언제였던가? 내게도 비슷한 말을 하셨다. “내게로 와라, 나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내자!” 하시던 예수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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