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날, 리야드로 떠난 취업방랑기이자, "썸"타는 이야기
리야드 알아카리아 쇼핑센터
산부인과 의사인 루루와 약속을 했다. 이번 금요일에 나들이 나갈 때 ‘알아카리아’ 쇼핑센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영어로 말하기가 훨씬 수월해진 것도 약속 부담이 덜됐다. 수경 간호사의 말처럼 시간이 해결해 준 면도 없지 않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판다고, 내가 답답해서 억척스럽게(?) 공부한 점도 조금 있다.
병원 고참 언니들은 기숙사 방 안에 대부분 브라운관 텔레비전과 VHS 비디오테이프 녹음기를 갖추고 산다. 여기 사우디에는 밖에서 즐기만한 오락거리가 별로 없다. 눈 씻고 찾아봐도 영화관은 찾을 수 없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신기할 수 있지만, 여기는 여기 방식대로 사니 별 수 없이 맞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바깥나들이 나갈 때,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언니들 방에서 본다. 한국에서도 ‘건어물녀’ 였던 나였기에 오히려 방콕하며 영화비디오 보는 게 편했다. 자연스럽게 건어물녀들끼리 모여 영화 마니아 팀이 생겼다.
영화는 미국 액션영화나 러브스토리 영화를 보는데 영어자막과 아랍어 자막이 화면 밑에 뜬다. 어떤 영화는 120분 내내 모자이크 된 부분만 있다. 사우디에서는 ‘와하비즘(Wahhabism)’이라고 모태 이슬람, 복고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경건주의가 은근히 판친다. 처음 이슬람이 얼마나 경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한 장면도 안 돼, 피범벅도 안 돼, 무슨 19금 영화 보는 것도 아닌데, 조금 흥분하려 치면 모자이크다. 그래서 나도 화면보다는 영어대사를 주로 들었다.
어느 날 버터발린 영어 대사가 귀에 들어왔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누워 딩굴딩굴 하며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영어가 들려도 되나, 싶었다. 대사가 빨라서 못 알아들었던 배우들의 말이 들렸다. 마치 배우의 행동에 딱 맞춰서 들렸다.
영어가 들리자 말하기도 수월했다. 머릿속에서 짜깁기하지 않아도 주어와 결론부터 말하고 대충 그만한 이유를 대나갔다. 로라 아줌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수다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루루가 쇼핑센터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OK, 했다. 로라 아줌마는 굽실굽실하기 바빴던 그녀에게….
는 1989년 한국으로 치면 서울의 미도파 백화점, 화신 백화점, 부산의 미화당 백화점, 대구의 대구백화점 등등 다 합쳐 놓은 크기다. 한국은 금싸라기 땅에 백화점을 짓다 보니 층수는 높다. ‘알아카리아’ 쇼핑센터는 단층인 대신 엄청 길고 넓다.
부산 남포동 극장가에 위치한 미화당 백화점은 엄마가 자주 애용했다. 엄마는 한 번씩 스트레스를 백화점에서 푼다. 가볍게 버스를 타고 가서는 양 손에 무겁게 들고 택시를 타고 온다. 내 옷을 사준다며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 엄마는 부인복 코너만 돌면서 이 옷 어때, 저 옷 어때, 했다. 내가 부인복이 왜 필요해, 할 틈도 없이 자기 옷을 산다. 나도 따라온 김에 오기가 나서 위아래로 추리닝 한 벌 맞췄다.
아무튼 그렇게 둘러 본 백화점도 넓다고 생각했는데….
‘알아카리아’ 쇼핑센터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여기서 아바야를 입고 허벌나게 뛰는 사람은 한국여자 밖에 없다.”
통근 버스가 쇼핑센터 입구 정류소에 닿자, 루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입은 단출한 검은색 아바야는 비교가 안 되는, 금색 문양이 옷깃을 따라 새겨진 고급 실크의 아바야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엔티크한 아라비안 문양의 가죽 가방까지….
같이 걸어가는데 내가 꼭 ‘서번트(하인)’처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쇼핑 전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쇼핑 짐까지 들고 있었으면 영락없는 소공녀와 무수리 궁녀다.
우리 둘은 뭐시기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유명한 아라비안 풍의 고급 레스토랑인데 아쉽게도 식당 간판을 읽을 수 없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꼬부랑 아랍어 붓글씨체다.
레스토랑 안에는 여성 전용좌석이 따로 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아바야를 입은 여성뿐이다. 그녀들은 아랍어로 살라살라, 했다. 루루가 미리 주문했는지 아랍전통 과자가 소쿠리에 담겨 나왔다. 말린 과일과 과자가 종류별로 담겨있다.
“무슨 과자를 좋아할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가져오라고 했어요. 외국인들이 다들 여기 과자를 좋아해서…. ‘바끌라바’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나는 입맛을 다셨다. 기숙사 식당에도 디저트로 사우디과자가 나오지만 마트에서 사온 과자이고, 이렇게 요리되어 나온 과자를 먹기는 처음이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는데 그 향기가 달랐다. 바끌라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시럽이 아몬드를 촉촉하게 감싸고 있다. 부스슥, 입 안에서 부드럽고 달달한 파이가 부셔진다. 딱딱한 아몬드가 뽀드득, 이빨에 씹혔다.
‘모래성일까? 모래 땅 위에 세워진 견고한 성….’
사우디에 도착한 첫날밤, 전용버스를 타고 오며 리야드 밤풍경을 멀리서 봤었다.
에메랄드처럼 빛났던, 모래 위에 세워진 젖과 꿀이 흐르는 왕궁을….
“샌드 캐슬(Sand castle) 맛이네요.”
“What? Sand castle! 무슨 맛이죠?”
루루는 어처구니없는 맛인가 하며 나를 바라봤다.
“파이는 모래처럼 스르륵 입 안에서 허물어지며 녹아버렸어요. 파이 위에 올려 진 아몬드는 조금 딱딱했고, 달았어요. 마치 견고한 성처럼.”
루루는 내 표현에 구미가 당긴 모양이다. 그녀도 바끌라바를 한 입 깨물었다.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지만, 모래땅은 쉽게 무너져 버려요.”
루루는 갈수록 내 말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아니면 어느새 미스 수진이 이렇게 영어가 늘었지 하며 신기해하든가.
“여기가 마치 모래성 같아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같은 게….”
“루루같이 응어리 진 젊은 여성들이 여기 가득 차잖아요.”
루루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이런 이야기는 영어로 한다고 해도 조심하는 게 좋아요. 누가 우리 이야기를 듣고 종교경찰에게 이를지 몰라요.”
루루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전에도 종교경찰이 내 뒤를 뒤따라왔어요. 비밀 연애하는 지 감시하려고요. 단지 물건 사러 나왔을 뿐인데.”
그때 카펫시장에서 부딪친 종교경찰 때문에 잠시 기분이 우울해졌다.
“우리 분위기를 바꿔요. 혹시 미스 수진을 은근히 엿보는 사람 없어요. 종교경찰처럼 감시하는 사람 말고. 흐흣.”
“누가 나를 엿보지. 징그러워. 나 요즘 빨간 팬티 입고 다니는데 부끄러워요.”
루루는 한참 어이없어 하며 웃더니, 19금 분위기로 금세 바뀌었네, 했다.
“오늘 후견인을 한 명 소개할 게요. 쇼핑 나올 때 같이 따라오는 오빠가 있어요. 보,디,가,드.”
그녀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왔다. 우리 뒤에 남자가 한 명 붙었다.
‘어머! 마호멧…. 아람코의 젊은 간부 사원.’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손을 입술에 모으고 얼음이 되었다.
“쇼핑할 때 내 보디가드. 친오빠에요. 아마 인사 했죠.”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루루는 내 귀에 입술을 대며 소곤거렸다.
“이 오빠가 은근히 누굴 엿보길 잘해요.”
루루와 나는 앞에서 걷고 마호멧은 뒤에서 따라왔다. 나는 루루의 손을 잡고 겨우 걸었다. 뒤를 슬쩍슬쩍 돌아봤다.
‘어떻게 해. 오늘 쇼핑계획은 물 건너갔다. 이런 보디가드를 데리고 무슨 물건이 눈에 들어오겠어.’
루루와 마호멧은 친남매였다. 그것도 왕족 가족이다. 서열이 낮을지는 몰라도….
루루는 오빠와 병원 이야기를 하다 ‘미스 수진’ 이야기를 꺼냈는데 ‘좀 유별난 한국여성’이라고 소개했단다. 오빠는 아람코 신입직원 정기검진도 있고 해서 한 번 얼굴이나 보러 갈까 했다고 한다.
그럼,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로라 아줌마는 왜 이런 이야기를 안 해줬지, 하며 두 사람에게 반문했다.
“로라 아줌마는 이집트에 자기 친척을 데려오고 싶어서 애걸복걸하는 거죠. 우리가 후견인이 되면 쉽게 데려올 수 있고, 직장도 구하기 쉬우니까. 자기 생각뿐이에요.”
로라 아줌마가 루루에게 붙어서 사바사바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다음에 미스 수진을 집으로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마호멧의 말에 나보다 루루가 먼저 반응했다.
그를 얄미운 듯 쳐다봤다.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냐? 여긴 사우디라고.”
어느새 쇼핑센터 입구까지 왔다. 기숙사 통근 버스가 올 시간이 되었다.
그 전에 검은색 캐딜락이 미끄러지듯 입구에 섰다. 차체가 미끈하게 잘 빠졌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렸는데, 중년의 아랍인 기사였다. 검은색 양복 차림이었다. 루루와 나는 양 볼을 맞추며 인사했다. 마호멧과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마호멧이 뒷좌석 문을 열고 루루를 태우웠다. 보통 운전기사가 뒷좌석 문도 열어주고 하던데, 이 운전기사는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마호멧이 그에게 땡 큐, 했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운전기사는 두 사람을 태운 캐딜락을 몰고 아스라이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