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 연가(戀歌)ep.25

젊은날, 리야드로 떠난 취업방랑기이자, "썸"타는 이야기

by 김재석

ep.25 친선인의 밤

나는 여름휴가를 마치고 병원 업무에 복귀했다. 마호멧과는 일정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도 한두 번 외래검사센터로 과일바구니와 과자선물세트를 보내왔지만 따로 방문하지는 않았다. 사우디 2년차인 1989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는 초청장이 날라 왔다. 사우디아라비아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인 직원 앞으로 보내왔다.

‘사우디아라비아 알힐랄 축구팀 초청 한국-사우디 친선인의 밤 개최’

나도 기숙사 원룸에 TV를 놓았다. 영어에 자신감이 붙자, 이번엔 아랍어 방송에 관심이 갔다. 우물 안에서 노는 병원생활이 아니라, 사우디 이모저모가 알고 싶었다. 마호멧이 사는 동네에는 어떤 일들이 관심사인지, 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다. 채널을 돌리다 보니, 웬 축구채널이 이렇게 많은지…, 온통 축구밖에 관심이 없는 것 아니야, 했다. 한마디로 스포츠는 축구밖에 없는 것 같았다. TV카메라가 축구경기를 보여주는데 관중석엔 온통 남자들 투성이고, 아바야를 입은 여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여자들은 축구장에서도 숨바꼭질 놀이 하나?’

축구 경기가 아무리 남자들 놀이라고 해도 보는 건 같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알힐랄 축구팀은 연고지가 리야드인데다, 사우디 프리미어리그 최강자라 인기가 하늘을 찔렸다.

김 사감이 대사관 초청행사에 참석할 인원을 체크했다. 나는 방콕한다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가 영화마니아 팀 고참 언니들에게 끌려나왔다.

‘모자이크 영화는 그만 STOP, 오늘은 모자이크 걷어내고 리얼 파티를 즐기는 거야. 영화배우보다 더 유명한 축구선수들이 온다잖아. 레츠 고’, 했다.

영화마니아 팀 선미 고참은 이참에 흰 드레스를 따로 차려입었다.

“웬 드레스야 언니, 아바야 안 입고?”

나는 아바야 차림으로 내려왔다가 다들 파티 드레스를 입고 있길래 화들짝 놀랐다. 더군다나 한결같은 아바야 차림의 김 사감마저 파티 드레스를 입었다.

“오늘만큼은 예외야. 대사관은 치외법권지역이거든. 연애도 옷도 자유야. 흐흣.”

나는 선미 언니를 따라 웃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나쁜천사 : 나만 바보인거야

착한악마 : 파티 드레스도 없는데 다행인거지.

선미언니는 내숭쟁이라 티를 잘 안내지만 사우디 외과 닥터와 ‘썸’타는 눈치였다. 오늘 친선인의 밤 행사는 병원장 부인인 한국인 사모가 큰 역할이 했다. 그녀의 부탁으로 한국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인 닥터들도 초대되었다. 선미언니는 오늘따라 화장이 짙었다.

리야드 시내 킹 칼리드 도로 변 외국대사관이 밀집된 지역에 한국대사관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대사관 철문으로 들어서자, 넓은 정원에서 가든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칸두라를 입고 정원을 돌아다니는 사우디 초청자들과 한국기업인, 대사관 직원들로 가든파티는 왁자지껄했다. 가자고 꼬드긴 선미 언니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졌다.

김 사감이 나를 데리고 병원장 한국인 부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선배님, 저희들 결혼생활을 무척 궁금해 하는 수진씨에요.”

나는 병원장 부인과 목례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다과가 차려진 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병원장 부인은 다나한 한복차림이었다. 분홍색과 노란색이 조화롭게 물든 한복은 그녀를 더 아름답게 받쳐주었다. 중년의 여성미가 흘러넘쳤다.

“김 사감은 수진씨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지? 내가 결혼을 적극 추천했다고, 아니면 이 간호부장이 적극 반대했다고? 흐흣.”

“아직, 그런 이야기는…. 수진씨가 친구하자고 신라면을 대접했는데, 그 때 한국 생각이 울컥 나더라고요. 땀 닦으며 눈물을 참느라고 혼났어요.”

김 사감은 그때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을 여기서 닦아냈다.

“수진씨, 선배님도 여기 간호사로 오셔서 병원장과 결혼하셨어요. 제가 비밀연애하고 있을 때, 선배님이 고민 상담을 많이 해주셨어요. 물론 이 간호부장님은 뒤로 불러내서 호통만 쳤지만….”

병원장 부인은 김 사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 간호부장이나 나나 같이 한국에서 건너왔었지. 연애가 우리 두 사람의 길을 갈라놓았지만. 그녀는 캐리어우먼으로 남았고, 나는 병원장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지. 그래도 그녀가 한국직원들을 잘 이끌도록 돕는 역할을 했어. 내가 그렇게 도움을 줘도 아마 나를 엄청 욕할 걸. 흐흣, 내가 애들 다 망쳐놓았다고….”

“적어도 한국에서처럼 불륜은 아니잖아.”

나는 어색하게 한마디 던졌다가 두 사람을 웃기고 말았다.

병원장 부인과 김 사감이 쿡쿡, 거리며 웃는데 나는 어정쩡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김 사감이 병원장 부인을 많이 의지하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아마 그녀의 결정에 병원장 부인의 응원도 한몫했을 터였다.

나는 마호멧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려다 차마 내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병원장 부인은 결혼생활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해 주었다.

‘근거리연애와 주말부부사이라고.’

집은 대궐 같아서 본채와 별채, 사랑채가 있고, 부인들끼리는 따로 산단다. 어떨 때는 근거리연애를 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주말부부처럼 가끔 보면서 말이다. 절대 심각한 삼각관계는 아니라고 했다. 아이들끼리 다투기는 한다고 했다. 자기들을 대신해서…. 흐흣.

저편에서 병원장과 마호멧, 루루가 우리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맞아주었다.

“어머, 마호멧, 루루, 오랜만이야.”

병원장 부인은 마호멧과 루루를 마치 친척처럼 반겼다.

“수진, 이쪽 분들은 남편의 형님 아들, 딸들이지.”

병원장 부인이 서로 인사를 시켰다. 나는 낯 뜨거워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인데….

그 때,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알힐랄 축구팀이 하나둘 입장했다. 마호멧과 나는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고 축구팀을 향해 박수를 쳤다. 사우디 국영방송국에서 인터뷰를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을 질렀다. 선미 언니가 사우디 닥터랑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소곤거리며 축구팀을 바라봤다. 루루가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평민들도 노력해서 축구선수만 되면 부와 명예를 다 가져가죠. 저 선수들이 사우디의 미래겠죠. 어떻게 파티는 즐기고 있어요?”

나는 마호멧과 루루 사이에 끼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녀의 귓가에 소곤소곤했다.

“나 지금 얼음되었어요. 마호멧이 조각칼을 들고 날 얼음공주 만들려고 해요.”

루루는 쿡쿡, 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다음 휴일에….”

루루는 초대의 말을 던지며 마호멧을 슬쩍 보더니, 또 다시 쿡쿡,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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