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한일여실 학생의 수기를 읽고
'한일합섬의 기억' 수기 공모전 심사를 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한일합섬 부설 한일여실고에서 여공과 여고생으로 힘겹게 살았던 분의 수기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나왔다. 오죽했으면 부모님께 이런 편지를 쓰기까지 했을까. 게다가 그 시절 사진들을 보니 기업과 학교는 군대조직과 같았고, 한국은 병영국가였다.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16절지 편지지 두 장을 꺼내 놓고 나니 할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갑자기 그립다 못해 설움이 왈칵 덮쳐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엄마라는 단어 옆에 느낌표를 찍고 백지 두 장에 온통 새까맣게 황칠(환칠의 방언 : 되는대로 얼룩덜룩하게 칠함)을 하고 마지막에 또 느낌표를 찍었다. 그 순간 어머니를 향한 나의 솔직한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뚝뚝 떨어진 눈물까지 보태어 편지를 봉하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보냈다. 편지를 받은 부모님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내가 저지른 철없는 행동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애를 썼지만, 지워지지 않고 가슴은 한없이 아려왔다. 며칠이 지난 후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왔다. “자야, 고생 많은 줄 알고 있다. 아비로서 한없이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는 믿는다, 진정 네가 내 딸이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졸업할 때까지 잘 견디라는 장문의 편지였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따리 챙겨 집으로 오라는 기별이 올 줄 알았는데 편지는 예상 밖이었다. 어떠한 힘든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숙사는 군대생활 만큼이나 엄격했다. 외출과 외박도 사감 선생님의 허락이 필요했고, 정해진 시간에 인원 파악을 하고 취침 벨이 울리면 일제히 전깃불이 소등되었다. 어쩌다 책이라도 읽고 싶으면 화장실이나 비상구를 이용해야 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난쟁이 가족의 궁핍한 삶, 빈민들의 삶과 좌절이 바로 나의 삶이었다. (중락)
어느 밤 근무 때였다. 졸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허벅지를 꼬집기도 하고 찬물에 세수해도 염치없이 찾아오는 잠 때문에 기어코 사고가 났다. 둥근 롤러가 맞물고 돌아가는 기기에 꾸벅하다가 손가락이 들어간 것이었다."
**참. 한일합섬이 마산뿐 아니라 김해와 대구, 수원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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