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 중국 길림성 시골마을에서 만난 이옥선 할머니의 증언기록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11일 저녁 돌아가셨다. 내가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3월이었다. 할머니가 살고 계시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팔도진 시골마을 집을 찾아가 뵈었다. 한국정신대연구소 고혜정, 서은경 연구원, 그리고 경남정대연 박소정 사무국장과 함께였다.
당시 할머니는 나무판자 울타리가 있는 초가집에 살고 계셨는데, 당시 71세의 나이에도 영민하고 아주 씩씩한 분이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인터뷰한 내용을 신문에 기사로 썼는데,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추모하는 마음으로 여기 옮겨둔다.
이옥선 할머니(71, 부산 보수동 출신)는 연길에서 택시로 한 시간 거리인 용정시 팔도진이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에 살고 있었다. 용정시는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할머니는 1996년 말 연길 고려대학 박상제 처장의 도움으로 한국에 생존해 있는 오빠와 남동생 등 형제들을 찾았다. 이때 할머니는 한국 TV에 출연, '위안부' 체험을 일부 털어놓기도 했다.
할머니는 "일본사람이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일본사람이라 하지 않고 '일본놈'이라고 부른다"면서 "한국에 갔을 때 '일본놈' 대사관 앞에서 한다는 수요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게 제일 아쉽다"고 말했다. "대면만 시켜주면 데모하는데 앞장서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재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위안부' 경력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자신은 거기에 개의치 않는다며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막노동을 했고, 술을 아주 좋아했던 것 같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콩나물 고르는 일을 해주고 남은 콩나물 뿌리 부분을 주워와 소금을 넣고 삶아먹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술꾼이다 보니 어머니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삯바느질부터 채소장사를 거쳐 나중엔 길거리에서 해장술을 팔았다. 소녀 이옥선은 일곱 살때부터 공부가 하고 싶어 매일 학교에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다. 그때부터 공부가 하고 싶어 운 게 열다섯 살까지 울었다.
옥선이가 열다섯, 동생들이 각각 7,5,4살이던 어느날이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옥선을 불렀다.
"부산진역 어드메에서 우동을 파는 식당이 있는데, 그집에 딸이 없어 양딸을 얻는다는데 가겠느냐."
"거기 가면 학교 보내주나요?"
"그래, 거긴 밥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학교도 보내 준단다."
"그럼 나 갈게요."
이래서 열다섯의 소녀 옥선은 식당에 양딸로 갔다. 그러나 학교를 보내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양딸도 아니었다.
조선인 주인은 온갖 허드렛일은 물론 술 접대까지 시켰다. 옥선은 술 접대를 거부하고 두 번이나 도망을 갔다가 붙잡혀가 얻어맞기도 했다.
거기서 몇 달 안 돼 주인은 울산의 술집에 옥선을 팔아넘겼다. 그집은 기생집이었다. 여기서도 옥선은 밤 12시까지 식모질과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했다. 너무 힘들어 밤에 자다가 오줌을 지린 일도 있었다.
여기 온지도 1년이 채 못돼 중국 만주로 끌려왔다. 기생집에서 심부름을 나왔다가 백주대로에서 납치를 당한 것이다. 그때가 1942년 7월, 옥선의 나이 열여섯(만 15세)이었다.
울산에서 오후에 심부름을 나왔는데, 10살이 넘어보이는 뚱뚱한 조선남자 2명이 손목을 확 나꿔채며 "가자"고 했다. "싫어요. 놔주세요" 했더니 우악스런 힘으로 "잔말 말고 가자"며 입을 막고 트럭에 실었다. 댕기머리에 조선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트럭에 실려 울산역으로 가니 다른 여자들도 몇 끌려와 있었다.
울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틀 정도 걸려 중국 길림성 도문에 도착했다. 여자들은 짐차통(화물칸)에 실려왔는데, 창문이 없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밥도 주지 않았다. 기차를 갈아타게 되면 도망할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한 번도 갈아타는 일 없이 도문에 도착했다.
함께 온 여자들은 15명 가량이었다. 그중엔 열네 살도 있고 옥선이와 동갑도 있었다.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자는 공론도 했으나 결행할 수 없었다.
도문에 도착하여 옥선을 포함한 5명은 역 근처의 유치장에 감금됐다. 여기서 또 하룻밤을 잤는데 유독 옥선 만은 독방에 감금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때까지도 밥은 주지 않았다.
도문에서 연길까지 다시 기차를 타고 처음 끌려간 곳은 연길의 동비행장이 있던 일본군 부대(현재의 연길 사회정신병원 앞) 안에 흙으로 지은 막사였다. 위안소 간판은 없었고 지붕은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본군대 내무반으로 쓰던 건물이었는데, 군인을 당분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여자들이 쓰도록 했다.
이곳에서는 막사가 비좁아 10여 명의 여자들이 각각 하나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 하나에 2~3명의 여자들이 들었다.
처음엔 부대 안 마당에 풀도 뽑고 마당도 쓰는 일을 시켰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방에 들어와 다른 동무들이 보는 앞에서 짐승처럼 여자들을 겁탈했다.
이곳에 있을 땐 사쿠(콘돔)도 안 쓰고, 성병 검사도 안 했던 것 같다. 그때 임신한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아이를 낳자 일본 군인이 데려갔다.
좀 있다가 인근에 위안소 건물을 신축해 이사를 했는데, 이곳에선 한 방에 한 명씩 여자들이 들어갔다.
부대 안에는 조선인과 중국인 남자들이 근로봉공대란 이름으로 있었는데 그 숫자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던 것 같다. 이옥선은 그때 봉공대에서 소대장을 하던 조선인 남자와 눈이 맞아 정분을 맺었다. 봉공대는 여자들이 있는 위안소에 올 수 없었는데, 밤 늦게 동무들의 묵인하에 그 조선인 남자와 밀회를 갖기도 했다.
소녀 옥선은 이곳에서 첫 월경을 겪었다. 처음엔 군인들을 받은 게 잘못돼 그런 줄 알고 잔뜩 겁을 먹었으나 동무와 언니들의 말을 듣고 초경인줄 알았다.
위안소에는 밥 짓는 조선여자가 따로 있었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군인을 상대하는 일만 했다. 주인은 일본인 부부였는데, '위안부'들은 이들을 '오바상' '오카상'이라 불렀다.
또다른 일본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 역시 '위안부'였으나 돈을 벌기 위해 자청해 온 것으로 조선인 '위안부'보다 자유로웠다. '네상'이라고 불린 그녀는 주인이 별로 강압하지 않아 군인들을 그다지 많이 받지 않았다.
1943년 봄이 되자 위안소가 현재의 서시장 부근으로 옮겨 갔다. 큰 출입구와 복도가 있는 이 위안소는 출입구 안쪽에 널빤지를 걸어놓고 '도미코' '아카다' 등 여자들의 이름을 죽 걸어놓았다. 방문 앞에는 따로 여자의 이름을 써놓지 않았으나 성병에 걸리면 출입구의 나무패를 뒤집어 놓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여러 명의 군의관들이 와서 성병검사를 했다. 606호 주사는 정말이지 너무 아팠다.
성병은 무료로 치료를 해줬으나 다른 병은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이옥선은 심부름을 나갔다가 조선인 경찰관에게 귀뺨을 얻어맞아 고막이 터지고 귀에서 고름이 나오는 등 심한 귓병을 앓았으나 치료를 해주지 않아 지금도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군인들은 입구에서 표를 사가지고 여자 방에 들어왔다. 여자들은 군인이 한 명씩 다녀갈 때마다 표를 한 장씩 뗐다. 평일에 적을 땐 1~2명, 보통 10여 명, 토일요일엔 30~40명까지 군인을 받았다.
생리 중에도 군인을 받아야 했다. 그럴 땐 주인이 누런 솜 같은 걸 줘서 하체 깊숙이 밀어넣고 받았다.
군졸과 군관의 값의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군관들은 밤에 자고 가기도 했고, 여자에게 돈을 더 얹어주기도 했다. 여자들이 말을 안듣거나 손님을 안받으면 주인이 군인(헌병)을 불러 때리게 했다.
한 번은 땅딸보 헌병이 혁대를 풀어 이옥선을 마구 때리는 바람에 데굴데굴 굴렀던 기억도 있다. 특히 이옥선은 자주 주인에게 반항을 하는 바람에 많이 맞았다.
입는 것과 먹는 것은 여전히 처참한 수준이었다. 군인들이 밥을 남기면 먹고, 남기지 않으면 굶었다. 너무 배가 고파 능쟁이풀(돼지풀)을 뜯어다 삶아먹기도 했고, 일본군이 입다 버린 속내의와 발가락이 갈라지게 만든 헌 양말을 주워 빨아서 신었다.
열네 살 짜리 어린 소녀가 하나 위안소로 왔는데, 이 소녀는 일반 군졸들은 받지 않고 부대에서 제일 높은 일본영감(사단장)만 접대했다. 사단장이 부르면 경리가 데리러 왔다. 이 소녀는 달아났다가 붙잡혀 온 후 다시 도망쳤다. 부대에서 잡으려고 난리를 쳤으나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위안부'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졌다. 이옥선과 다른 여자 몇몇도 도망하려던 계획을 세웠는데 이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또 한 번 위안소가 옮겨 갔는데 지금의 연변병원 남쪽이었다. 대문까지 달려 있는 이곳 위안소에서 계속 '위안부' 노릇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앞두고 전쟁이 벌어지자 위안소의 일본인 관리인들이 '위안부'들을 데리고 피란을 다녔다. 산 속 나무 밑에 숨어 있으면 주인이 어디선가 주먹밥을 구해왔다.
한때 '위안부'들끼리 '오바상' 아바이를 죽여버리자는 공모를 하기도 했으나, 주인이 지금의 옌지공원 뒷산으로 20리쯤 들어간 곳에 있던 헌 초막에 '위안부'들을 데려다놓고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도망을 가버렸다. 해방된 줄도 모르고 며칠을 있던 '위안부'들은 초막에서 조선족 농민을 만나 연길로 다시 돌아왔다.
이곳에서 며칠간 비렁뱅이로 구걸을 하며 간신히 연명했다. 이땐 특히 소련군이 여자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다. 소련군인들에게 붙잡히면 윤간을 당한 후 총에 맞아죽거나 불에 타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당한 피해자들도 주로 조선여성들이 많았다.
구걸로 수일을 버티던 중 연길동비행장 위안소에서 만나 정분을 맺은 조선인 남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옥선이가 첫 위안소에 있을 때 근로봉공대로 끌려와 부대 내에서 은밀히 정분을 맺어온 사이였다.
당시 그의 집은 지금 이옥선 할머니가 사는 용정시 팔도진에 있었다. 그를 와락 껴안고 "나를 구해달라"며 노골적으로 구애를 했다. 그 길로 그의 집에 와서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식을 한지 나흘만에 군에 입대를 하고 말았다. 몇 달 후에 잠시 돌아왔으나 다시 떠나 영원히 이별을 하고 말았다. 남편은 나중에 북조선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로부터 10년 간 시부모를 모시고 농사일을 했는데, 어느날 시아버지가 그녀를 불러 앉혔다. "그동안 남편도 없이 시부모 공양한다고 고생 많았다. 내가 좋은 남자를 봐두었으니 재가를 하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재혼한 사람이 지금의 남편 김기환(78)이다. 남편도 다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만주로 이주, 일본군에 의해 근로봉공대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74세까지 밭갈이도 할 정도로 건강했으나 3년 전부터 중풍을 앓아 지금은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이옥선 할머니는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아 위안소에 있을 때도 일본글자를 배울 정도였으며, 우리말도 누구보다 유창했다.
해방 후 팔도진에 살면서 공작활동도 열심히 하며 부녀주임과 청년단위 조장을 했으며, 연극배우까지 했다.
워낙 똑똑하여 주위사람들이 무슨 대학 나왔느냐고 묻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호미대학 농업과 나왔다"고 거침없이 대답한다고 말했다.
임신을 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으나 부모 없는 아이를 하나 데려와 키웠다. 아들은 좀 모자라지만 성실하고, 손자가 둘 있는데 모두 똑똑하다고 자랑했다. 할머니는 방 안에 '즐거운 우리글 공부'라는 글자판을 걸어놓고 틈틈이 손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할머니의 증언은 거침이 없었다. 자식이 없는 이유를 물어보자 "왜놈들이 수은을 쐬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위안소에 있을 때 매독이 걸린 적이 있었다. 하체가 헐어서 손님을 못 받게 되자 군대병원에서 사르바르(606호) 주사를 맞았으나 두어 달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그러자 관리인이 군의관에게서 구해 온 은색 수은을 조그만 종지에 부어놓고 불 위에 얹어 태우며 기화되는 수은을 할머니의 하체에 쐬었다. 할머니는 얼굴을 가리고 하체를 드러낸 채 수은이 타는 종지에 하체를 내밀었던 것이다.
이 경악스런 일로 매독은 씻은 듯이 나았지만 할머니는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업는 불임여성이 되고 말았다.
한국에서 온 낯선 남성기자와 남편이 옆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여성의 수치스런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일본의 만행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며 이야기를 마친 할머니는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와 우리 일행을 배웅했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자 동행한 박소정 씨가 할머니를 껴안으며 "할머니 오래 사셔야 해요"라고 속삭였다. 금방까지 당찬 표정으로 일본을 규탄하던 할머니의 눈가가 갑자기 시뻘개지더니 투명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1998년 3월, 김주완
+유튜브에서 팟캐스트로 듣기 https://youtu.be/ZTiySaKU2ck?si=NXsQ6CpcnBnrkm8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