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를 통해 본 아들러의 사랑관
아들러는 상대를 구속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는 것. 그게 사랑일세.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는 결국 깨지게 되어 있어.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애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연인 사이나 부부관계에 있어서 어느 시기가 지나면 상대가 하는 행동에 사사건건 화가 날 때가 있어. 밥을 먹는 모습이 얄밉게 느껴진다거나, 방 안에서 축 늘어진 모습을 보고 혐오감을 느낀다거나, 숨소리만 들어도 화가 난다거나, 수개월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건 그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고 결심하고, 관계를 끝내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세. 상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네. 자신의 '목적'이 변했을 뿐이지. 알겠나? 사람은 그럴 마음만 있으면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기적인 생물이라네. 상대가 성인군자 같은 사람일지라도 싫어해야 할 이유 같은 건 간단하게 찾아낼 수 있지. 그렇기에 세계는 언제든 위험한 곳이 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볼 수도 있는 거라네.
내 생각 : 책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쓴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그래야 진정 사랑하는 관계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상대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배하고 간섭하고 요구하는 경우는 어떻게 하나. 그 모습마저 순순히 인정하고 축복해주는 것이 사랑일까? 그게 난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