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통치약의 비밀

주문을 외워 보자

by 차가운 열정

유재석의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가 있다.

2011년 무한도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 출품작이다. 말의 황제 유재석이 꿈꾸는 소년 가수 이적을 만나 탄생시킨 대국민 희망 메시지. 가사는 대략,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진다, 꿈꾸는 것들 다 이룰 수 있다, 뭐 그런 내용이다. 그때도 좋았지만, 요즘 자꾸 오래된 그 노래가 생각이 난다.



아이가 요즘 좀 아프다.

자가면역질환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뒤죽박죽인 병은 처음 본다. 자기 몸을 자기가 공격한다. 면역 군대가 자기 몸의 가장 연약한 국경지역에 모여 특정 민간인들을 골라 공격하고 있다. 몸의 방어력을 높이려면 면역 군대의 전투력도 더욱 강력해지기 때문에, 무슨 치료 과정이든 다 자승자박이 되고 만다. 최근엔 '면역억제제'라고 하는 요상한 약을 처방받았다. 강제로 면역력을 떨어뜨려야 한단다. 면역 군대의 전투력을 떨어뜨리면 덩달아 민간인들의 방어력도 떨어질 텐데. 이건 못할 짓이다. 코로나 시대에 오직 자기 면역력 하나로 버티는 이 아이들의 가냘픈 상황을 더욱 코너로 몰고 가란 말인지.



자가면역질환은 면역'력(力)'의 세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의사는 아니지만, 아이 면역을 억제해서 병을 고친다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평생을 살아갈 면역력을 서서히 만들어가면서 성장하는 시기에 이미 완성된 성인들에게도 쓰기 부담스러운 약을 써서 어딘가를 붙잡아둔다는 것이 조심스럽다. 이건 의학적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엄마로서의 본능에 근거한 것이니 오해가 없길 바란다. 답답한 마음에 면역에 관한 책, 이 질환에 관한 책 등등을 아무렇게나 찾아봤는데, 모든 책에 깔려있는 공통적인 정서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믿음'.

나는 종교인으로서 '믿음'에 관한 내 나름대로의 철학과 기준이 있다. 믿음이 무엇인지 경험도 해보았다. 신을 향한 믿음은 반드시 그 응답이 나타난다. 이건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치명적인 영역들, 믿음으로도 손을 쓸 수 없는 영역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우리가 될 거라고 믿고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소하지만 굉장한 진리. 그걸 잊고 살 때가 많다.



보이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대로 진행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나는 어떤 상황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이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그럴 때 상황은 딱 내려놓고, 내가 원하는 어떤 상태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는 것. 당신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코로나가 종식되고 유럽 여행길에 오르고 있나? 작년 내내 못 만났던 그리운 얼굴들을 다 모아놓고 늦은 신년회를 벌이고 있나? 물론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믿음은 그냥 막연한 꿈과는 결이 다르다. 꿈은 실현 가능성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환상 혹은 이상의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반면, 믿음은 허황되어 보이지만 실현을 염두에 두고 실천적 의지를 향해 뻗어간다. 뭐,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라 정답을 주장할 순 없지만, 적어도 믿음은 사람의 행동 방향을 설정하고 의지를 굳건히 다지는 데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영화 '암살'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이중스파이 노릇을 했던 이정재가 마지막에 결국 암살당하면서 하는 말이 있다. 조선이 독립될 줄 몰랐다고. 그래서 그랬다고. 대부분의 변절자들이 다 비슷한 말을 했다. 반대로 죽음을 무릅썼던 독립 운동가들은 그 반대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반드시 독립되어야 하고,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고. 그 믿음이 있었기에 끝까지 갔다. 가시밭길이어도 그 끝을 보고 갔다. 심지어 죽음의 수용소에 갇혀 삶의 그 어떤 선택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매일 아침 유리 조각으로 면도하고 몸을 단정히 씻으며 생존할 것을 믿기로 했던 사람만이 해방의 순간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플라세보 효과라는 것이 있다.

placebo effect
의사가 효과 없는 가짜 약 혹은 꾸며낸 치료법을 환자에게 제안했는데, 환자의 긍정적인 믿음으로 인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이다. (네이버 백과 사전)


환자가 의료진에 대한 신뢰가 분명하거나, 그 약이 효과가 있다고 믿으면 몸에서 실제로 치유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심지어 같은 약이어도 가격이 높을수록 효과가 더 있었다. 현재 법적으로는 위약 처방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실험적으로는 결과가 분명한 이론이다. 다시 말해, 환자의 순수한 믿음과 의지가 있다면 반드시 호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깔아 놓고,

면역에 관한 각종 훈련들을 실행해야 한다. 유익균을 늘리고 유해균을 줄이기 위해 당을 줄인다든지, 장 누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단백질 섭취를 줄인다든지, 장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찬 음식을 줄인다든지, 면역력이 생성되고 관리되는 수면 시간을 보장한다든지, 체내 넘치는 열을 빼고 대사를 순환시키기 위해 운동을 지속적으로 한다든지, 호르몬을 관리하기 위해 일주기를 잘 활용하는 것 등등. 실제적인 행동 지침을 동반한다, 믿음은.





만병통치약이 있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약이 아니야."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침에 피곤해서 눈도 못 뜨는 우리 영감. 밤잠도 안 자게 하는 약이야. 딱 한 번만 먹어봐."

약장수가 뱀쇼도 하고 불쇼도 한다. 북 치고 장구치고 서커스를 동반하기도 하지만, 그냥 조촐하게 이런 뻔한 말발로 사기를 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뻔한 사기에 그냥 넘어가는 건 절대 아니다. 어쩌다 한번 찾아오는 견문 넓은 약장수의 최신식 문명에 대한 기대감과 약효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구매욕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 만병통치약은 어쩌면 이게 아닌지.

꼭 나을 거다. 좋아지고 있다. 이미 새로운 세포들이 솟아나고 있다. 그런 믿음. 어떤 하반신 마비 환자는 다른 사람들의 걷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이 걷는 순간에 마치 자기가 걷는 것 같이 상상하는 것을 지속했는데, 마침내 걷기에 성공했다. 이런 식의 치료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은 사실 뇌가 하는 일이다.

뇌는 반복적인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관련 신경세포를 만들어내고 신경과 신경간의 연결에도 성공하여 해당 부위의 신경과 운동을 활성화하고 치유한다. 자기만의 스토리로 자기 암시를 건다. 그렇게 될 것을 믿고. 상상도 하고 또 그에 따른 크고 작은 훈련도 한다. (참고 : <마음치료>, 데이비드 해밀턴 저) 각자 스토리는 만들 수도 있고, 목표 지점의 완성된 자기 모습일 수도 있고, 그 과정 중의 섬세한 모습들일 수도 있다. 또 어떤 명언이나 격언으로 확신을 다질 수 있고 누군가와의 보이지 않는 약속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자기가 믿는 진리나 신의 얼굴을 할 수도 있다. 뇌는 믿음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확장하고 활용하고 믿는다.




면역 억제제가 아니어도 좋다.

아이는 자기 몸에서 나쁜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천사가 건강하고 좋은 씨를 잔뜩 뿌려서, 그 자리에 싹이 트고 새로운 나무가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나는 상상을 하고 있다. 작은 몸이 잔디가 되고 들판이 되고 숲이 되어간다. 아침마다, 잠들기 전마다, 양약 대신 선택한 한약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이런 상상을 속삭이고 기도한다. 하루아침에 달라질 병은 아니지만, 절대 못 고칠 병도 아니다.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말하는 대로, 아이의 의지와 삶의 방향이 잡혀가고 야물어지고 깊어진다.



십 년이 된 노래인데, 이렇게 확 새롭게 꽂히다니.

말하는 대로 될 지어다. 새싹 돋아라. 새싹 돋아라.

숲이 될 거에요, 영차응차!!
















(제목 이미지: 네이버 <서해안고속도로 가요제>, 새싹 일러스트 by 차가운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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