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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09. 2021

[개묵상]_도깨비 방망이

서열 1위는 바로 나

개는 '서열'을 중요하게 여긴다. 

종종 고양이는 서열 너머에 존재하며 인간을 '집사'로 여긴다고들 하고 개는 서열 안에 갇혀 인간들 사이에서도 서열을 매기는 일에 열중한다고들 한다. 솜이는 명백히 우리집 제일 꼴찌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자긍심이 넘치는 것 같다. 자기 서열에 대해 기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지나쳐서 이제는 우리 중 제일 꼭대기 위에 앉으려고 한다. 




처음엔 워낙 예뻐하니까 그런가 했다.

주인과 상호작용이 잘 되니까. 그리고 비숑은 워낙 자기 표현이 분명하고 똑똑한 견종이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려고 하는 건가보다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 자기 서열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 녀석의 서열은 '나-남편-딸-아들-솜이'인데 솜이가 인식하는 서열은 '나(솜이)-엄마-아빠-누나-형'인 것 같단 말이지. 모두의 꼭대기 위에 군림하는 자, 솜솜! 




하지만 내가 주인인 건 확실하다.

솜이 녀석도 그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짓 좀 보소. 자꾸 날 조종하려 든다. 산책하다가도 '내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내가 가면 세상이 움직인다.' 하는 식이다. 다리도 짧고 몸뚱아리는 뚱뚱해서 땅에 딱 붙으면 줄을 당겨도 당최 움직여지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 날 잡아끌면 내 몸이 휘리릭 줄을 따라 끌려다닌다. 이건 누가 주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솜이가 다른 개의 응가 냄새를 맡으려고 하면 '지지.'하며 줄을 끌어당기고 또 다른 개를 만나면 줄을 풀어주며 사회성을 키워준다. 결정적인 조절은 주인 몫이다.




낑낑대며 할 말은 또 얼마나 잘 하는지.

제자리 걸음으로 앞발을 자꾸 모으면서, 고개를 바짝 들고 눈이 그대로 바사삭 부서질 것 같이 열심히 날 바라보며 낑낑댄다. 난 맥락을 따라 솜이어(語)가 다 통역이 된다. '간식 주세요.', '놀아주세요.', '산책 나가요.', '긁어 주세요.', '무릎에 올라가서 앉아있고 싶어요.' 등등. 누나 형아가 자꾸 만지고 집적대면 귀찮아서 쪼르르 도망와서 말한다. '귀찮아요. 저 인간들을 물리쳐주세요.', '도와주세요, 쉬고 싶어요.'라고. 정수기 밑에 가서 '물 주세요.' 한다. 밥그릇 앞에 가서 '밥 주세요.'하고. 놀잇감을 가져와서 '던져 주세요.' 한다. 못 하는 말이 없고 못 이루는 일이 없다. 




나는 원하는 걸 다 얻어낸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한다. 달라고 하면 다 주고, 해달라고 하면 다 해준다. 나쁜 것만 아니면 다 괜찮다. 사실 내가 일인자가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안다. 내가 어디로 뛰어가고 또 멈추든 우리 주인이 날 기다려주고 함께해준다는 걸 믿고 까부는 거다. 우리 주인은 내가 원하는 걸 다 아니까. 내가 필요한 걸 이미 준비해두었으니까. 우리 주인은 날 사랑하니까.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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