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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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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18. 2021

[개묵상]_터그 놀이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어린 시절에도 개를 키웠다.

하지만 나와 동거를 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부모님이 키우신 것이다. 개를 케어하는 법을 잘 모른다. 대학 다닐 때, 내 생일날 누군가가 길에서 주워왔다며 믹스견 새끼 한 마리를 쇼핑백에 넣어왔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아 키우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이기적인 나는 임용되면서 다른 지역으로 출퇴근과 숙박을 번갈아 해야 했기에 그 녀석을 엄마에게 맡겼다. 결론적으로 나는 개를 돌보는 법을 잘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반려견이라니.




처음 솜이를 입양할 때, 솜이는 내가 데리고 왔다.

나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손바닥만 한 이 아이를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걸어왔다. 앞으로 이 녀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사실 고민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그 사이 다른 식구들은 우르르 애견용품 가게에 몰려가서 솜이에게 필요한 용품들을 구경하고 사 오기 바빴다. 그중에 작은 헝겊 인형이 있었다. 아무리 새끼라곤 하지만 개에게 인형이라니,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사람도 아니고 개에게 무슨 인형씩이나? 나는 의아해했으나 유튜브를 보며 개 키우기를 염원해온 아이들은 그게 강아지 터그 놀이용으로 딱 좋아서 사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그 놀이.

헝겊이나 인형 같은 걸 물고 있으면 주인이 그걸 좌우로 당기고 흔들어주며 개가 물고 늘어지는 습성과 욕구를 채워주는 놀이이다. 입으로 앙, 깨물고 놓지 않는 동안 사냥 본능이라든가 입으로 대상을 탐구하는 즐거움을 채워주고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것이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개 주인이지만, 공부해서라도 잘 키우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을 키워봤기 때문에 대충 느낌으로 알 것 같다. 이런 단순한 놀이가 뭐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사실 좀 하찮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개에겐 정서적으로나 본능적으로 무척 충족감이 큰 놀이이다. 그렇다면 나도 좀 진지하게 놀아주어야겠다.




솜이가 어렸을 땐, 집중력이 매우 짧았다.

잠시 깨물고 놀다가 금세 다른 것을 보고 쪼르르 가버리곤 했다. 뭐든지 입으로 꼬물거리며 핥고 깨물고 찢고 빨고 뜯었다. 점점 자라면서 터그 놀이에 진심이 되어갔다. 이젠 제법 굵은 실타래를 가지고 논다. 한번 물면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제법 흥분해서 으르렁거리며 덤볐다. 내가 좀 쉽게 져주거나 놔주면 시시해서 다시 물고 와 도전했고, 힘이 세진 솜이 등쌀에 시달리다 놓아주면 그제야 만족하며 푸르르 숨을 몰아쉬곤 했다. 저러다 앞니 빠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힘 조절에 신경을 쓴다. 적당히 즐거움이 되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을 만큼 물어뜯게 해주어야 하지만, 솜이 척추나 이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방향과 에너지를 조율해준다. 헐떡이며 실타래를 놓을 때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 솜이는 그렇게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놀이가 아니다, 내겐.

나는 목숨을 다해 힘을 쓴다. 목 근육이 끊어지도록 힘을 주고 이빨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부지게 턱뼈를 다물어야 한다. 주인이 양 옆으로 실타래를 흔들면 내 몸이 통째로 양 옆으로 끌려다니고 어지러워 턱에 힘이 풀릴 것만 같지만, 그래도 나는 승부를 봐야 한다. 내가 마음 놓고 물어뜯을 수 있는 물건이 많지 않다. 실타래는 내 침과 숨결이 깊이 스며있는 몇 안 되는 내 물건이다. 내가 살아온 세월과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달린 내 생명의 씨름판이다. 실타래를 지켜내야 한다. 그동안 주인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내게 집중해주는 걸 느낀다. 같이 으르렁 소리를 내주면 나도 모르게 더 긴장이 되고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희열을 느낀다. 주인이 결국 져줄 걸 아니까. 주인은 내게 소박한 성취감과 삶의 희망을 줄 테니까. 주인은 나를 잘 알고 포기하지 않을 만한 수준도 잘 아니까. 놀아달라고 엉겨 붙는 내게 더 큰 애정과 성장을 약속해줄 테니까.






창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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